제목 불교탐구 - 제2부 삼보 - 7장 육바라밀
작성자 마이템플 등록일 08-03-16 13:30 조회수 1,251
 
 
제 7 장 육 바 라 밀
 
육바라밀(六波羅密)이란 불교의 여섯가지 실천덕목으로서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 지혜바라밀(智慧波羅密)을 말한다.  이는 원시불교시대 이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수행방법도 약간씩 변해왔는데 특히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육바라밀의 수행을 근본 덕목으로 강조해왔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에 의해 일체 중생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고 천명한 불교의 기본 수행법으로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또한 불자라면 반드시 육바라밀을 알아서 이것으로 신행생활을 해야 한다.
 
바라밀을 범어로 하면 파라미타(Paramita)라고 하며, 모든 고통의 경계에서 벗어나 해탈자재한 대적정에 이른다는 도피안(到彼岸), 즉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을 차안(此岸)이라 하는데 이곳의 반대인 이상세계, 부처님 세계, 완성된 세계를 피안(彼岸)이라고 한다. 즉, 바라밀이라는 말에는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과 완성이라는 두 의미가 있다.
 
  따라서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끊임없이 수행해가는 것이 바라밀의 참 의미이다. 이것은 곧 해탈에 이르는 길이고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사람을 바로 ‘보살’이라고 한다.
 
 
1. 보시(布施) 바라밀
 
  육바라밀의 첫 번째 덕목은 보시바라밀이다. 보시는 주는 것이다. 보시란 자비한 마음으로 자기의능력에 따라 아무런 조건이나 보답을 바라지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적 또는 정신적인 것을 베푸는 것이다. 보시로써 바라밀한다는 것은 보시함으로써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지름길을 닦는다는 의미다. 자연히 보시를 잘하면 능히 해탈할 수 있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시에 의해 탐심을 제거할 수 있다. 인간은 원래 영원의 세계에 와서 영원의 세계에서 살다가 영원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화 같이 회귀하는 순환 속에서 나누어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바쁜 그릇된 인생들이 많다. 우리 불자들은 보시의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보시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베푸는 이, 받는 이, 보시물건 등 세가지가 모든 청정해야 하며 (三輪淸淨), 대가를 바래서는 안된다. 이를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라 한다. 이처럼 보시는 공(空)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집착이나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진실한 보시가 아닌 것이다.
 
보시의 종류에는 법(法)보시, 재(財)보시, 무외(無畏)보시가 있다. 이 순서도 중요하다. 갈수록 실천하기 어려운 보시다.
 
(1) 법보시 (法布施)
 
  이것은 부처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으로, 다른 보시보다 더 근본적인 보시이다. 부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한없는 법보시를 하셨음을 본받아 우리도 이웃에게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나 경전 등을 전하는 것은 훌륭한 법보시가 된다.
 
 이러한 법보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베풀어 정신세계를 올바로 열어주어 참으로 잘사는 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사람이 물질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들이 산다고 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어느 부자마을 주민의 자살 건수가 세계 제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입고 큰 집에 산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님을 입증해주는 셈이다. 정신적인 고독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처럼 올바로 사는 법은 다름아닌 부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불법(佛法)을 함께 배우고 함께 깨달아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자의 법보시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닿는대로 능력껏 불교책을 법보시하고, 법담(法談)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2) 재보시 (財布施)
 
  이는 물질로써 보시하는 것이다. 보시는 육바라밀에서 가장 먼저 놓여 있다. 그만큼 보시가 쉽고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한다는 것은 나에게서 어떤 가치있는 것을 떠나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비우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버리는 것을 배우라고 하셨다. 버릴 줄 알아야 참 자유를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보시란 나를 버리고 나를 비워서 해탈을 이루도록 하는 바라밀인 것이다.
 
많은 재화를 쌓아놓고 마음으로 생각만 한다면 보시한 것이 못된다. 실천이 중요하다. 돈을 많이 모은 다음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조금도 남에게 베풀 기회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베풀 것이 있을때는 베푸는 것이 순리(順理)요 도(道)이다. 조금 있으면 조금 있는대로 보시할 줄 알아야 하며, 베푸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
돈에 집착을 하면 할수록 윤회의 수레바퀴는 더욱 세차게 돌아서 나의 고통과 윤회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보시할 재물이 없다면 육체적인 봉사도 좋다. 넉넉한 마음으로 능력껏 베풀 때 인색한 마음은 사라지고 더불어 탐하는 마음이 사라지므로 마음이 맑아지고 육체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남을 살린 것이다.
 
(3) 무외보시(無畏布施)
 
  이는 말 그대로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여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보시로서,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무재칠시(無財七施)를 가리킨다.
 
즉, 부드러운 눈으로 대하며 (眼施), 밝은 얼굴로 대하며 (和顔施), 좋은 말로 대하며 (言施), 예의바르게 대하며 (身施), 선한 마음으로 대하며 (心施), 타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床座施), 손님을 편안히 해주는 일 (居舍施) 등이다.
특히 한마디 축원은 매우 소중한 무외보시이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의 일이 아닌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해보자. 어느덧 나의 삶도 보람되고 화평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2. 지계(持戒) 바라밀
 
  재계라는 말은 계(=규칙 또는 질서)를 지킨다는 말로, 부처님 말씀에 계는 마음 속의 도적을 잡는 포승줄이며, 지키는 자체가 착한 업을 짓는 행위하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 제자가 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계를 지키는 것을 생활화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곧 선업(善業)을 실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불가의 계율은 사람에 따라 지켜야 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 출가스님이 지켜야 하는 청규(淸規)가 있고, 재가신도가 지켜야 하는 계(械)가 있다 또한 법회는 법회는 법회대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이러한 규칙들을 계율(戒律)이라고 한다. 비구(남스님), 비구니(여스님), 사미(20세전 동자승), 사미니(20세전 동녀승), 우바새(남신도), 우바이(여신도)의 여섯불자가 각각 적합한 것을 지키게 되어있다.
 
  비구스님은 250계, 비구니스님은 348계, 사미 또는 사미니는 10계, 우바새와 우바이는 5계, 그리고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대승보살계 48계, 계를 받지 않았어도 불자라면 지켜야 하는 10선계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계율 가운데 공통되는 것은 삼귀의계와 근본 4계가 있다.
 
 (1) 삼귀의계와 근본 4계
 
  삼귀의계(戒)는 불(부처님) 법(가르침) 승(스님) 삼보(三寶)에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계는 부처님께서 초기 교화를 하실 때 제가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던 기본 계율이다. 불교는 삼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삼보가운데 하나도 소홀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계를 받은 불자라면 삼보를 보호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스님의 존재가 보호받아 마땅한 것도 스님이 삼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님네들은 더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수가 있고, 아직 과정 중에 있는 수도 있으며, 또 한때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지탄받는 스님도 있지만 이럴 때에도 보호하고 감싸는 일을 재가불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자식을 여의고 출가하여 일생을 수도하며 사는 스님들은 신도가 아니면 가족처럼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 사람은 잘못을 해보면 바로 가는 길을 터득하게 된다. 잘못을 한 스님을 그래도 보살펴주는 신도들의 정성을 대할 때 스님에게는 그것이 마음의 채찍이 되어 더욱 수행정진하는 스님이 되게 돕는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귀한 삼귀의계를 오늘날에도 각 계를 받기 전에 반드시 먼저 받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근본 4계가 있는 것이다. 근본 4계는 모든 계율의 맨 앞에 목록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불살생 (살생하지 말 것)
 ② 불투도 (도적질하지 말 것)
 ③ 불사음 (사음하지 말 것)
 ④ 불망어 (거짓말하지 말 것)
 
이 네가지 계는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파계(破戒)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첫째, 불상생(不殺生)은 생명 존중을 의미한다. 살생을 자꾸하면 자비종자가 끊어진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도 자꾸 살생하다보면 마음이 포악해지는 것을 쉽게 경험한다. 우리 불자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계를 지켜 방생(放生)하여 무량복덕을 짓도록 해야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육식을 하지 말자고 하신 연유도 이 불살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득이 육식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삼정육(三淨肉) 또는 오정육(五淨肉)등으로 정갈한 것을 가리라고 하셨다.
 
삼정육이란 불견육(不見肉 자신을 위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지 않은 고기), 불문육(不聞肉 남으로부터 죽이는 것에 대해 듣지 않은 고기), 불의육(不疑肉 자신을 위해 살생했을 것이라고 의심이 가지 않는 고기)등이며, 여기에 오정육이란 수명이 다해 자연사(自然死)한 고기와 맹수나 새가 먹다 남은 고기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육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환경 속에서 육식을 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재가불자들은 절에 가는 날만이라도 육식을 하지 않는 생활을 하여서 가능한 살생을 줄이고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 불투도(不偸盜)는 훔지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건을 줍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도둑질을 하면 복덕의 종자를 끊는 것과 같아서 점점 박복해지고 불구가 되는 죄업을 받는다. 부득이 투도의 죄업을 지었으면 대신 보시를 통해 죄업을 소멸해야 한다.
 
셋째, 불사음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 미혼자가 음행하는 것, 기혼자가 외도하는 것, 수행자가 음행하는 것 등이다. 이는 모두 신의를 저버리는 삿된 것이므로 마땅히 금해야 한다.
 
넷째, 불망어는 입으로 짓는 네가지 구업(口業)을 말하는데, 망어(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기어(거짓말하는 것), 양설(한입으로 두말하는 것), 악구(욕설이나 험담하는 것)등이 해당된다. 입은 가벼운 만큼 몸이나 뜻으로 짓는 죄업보다 한가지가 더 많은 네가지 죄업이 있다. 「천수경」의 첫 구절인 “정구업진언”은 입으로 지은 죄를 말게 만드는 일도 하지만 진언을 읽으면서 입을 항상 무겁게 하여 신뢰를 쌓는다는 맹세이기도 한 것이다.
 
망어라는 것은 사람과 대화함에 있어서 불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은 항상 단정하고 신의가 있어야 하는데 근거없는 말, 공연히 면박주는 말, 남의 가슴 아프게 하는 말 등이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발설지옥에 가서 혀를 꼬챙이로 뽑히는 괴로움을 받는다. 차라리 말을 안할지언정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부득이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거나 중생의 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한해서 ‘열어놓는 법’이라 하여 허용한다.
 
두말하는 것 역시 입으로 짓는 구업이다. 이간질하는 것, 시주 약속을 어기는 것, 물건을 산다고 했다가 아무 이유없이 안 사는 것 등등 다 죄이다. 두말하면 혀가 갈리는 과보를 받는다. 욕설이나 험담하는 것도 죄이다. 욕설은 사람이 다듬어지지 않았을 때 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 욕설을 잘 하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죄업을 쌓은 것이 되어 결국에는 꼭 박복한 한두가지가 있게 된다.
 
또 간혹 남 싫은 소리 잘 하는 사람도 보게 되는데, 자신은 바른 소리라고 하여 시원하게 할지는 몰라도 듣는 이는 어쨌든 괴로울 것이므로 결국 인덕없고 박복한 씨를 심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단점을 들지 말고 장점을 말해야 한다. 그러면 단점은 자연히 녹아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부드럽고 순한 말을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재가 5계
 
  근본 4계에 ⑤ 불음주(과음하지 말 것)를 보태면 재가불자들이 지켜야 하는 재가 5계가 된다. 술은 과음하게 되면 지혜를 감퇴시키고 실수를 하게 되어 다른 죄업까지 짓게 한다. 음주운전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흉악한 무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계(戒)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법하신 내용에 속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우리 각자가 계를 잘 실천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터무니없는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한 차원 높게 자유로이 부처님 사상을 따라 개달음을 얻고자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 입문하고 어는 정도 기초가 잡혔으면 계 받는 것을 두려워말고 계를 받고 법명 또는 불명을 받아 불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대게 불자들이 계를 받으려고 생각하다가 계의 내용을 보고 지킬 자신이 없다고 포기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계는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하더라도 받으라는 말도 있듯이 계를 받으면 받지 않는 사람보다 죄를 덜 짓게 되며, 지키면 그만큼 복덕을 쌓는 것이 된다.
 
혹시 계를 파했다 해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보리심(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면 다시 계를 받는 것이 된다. 계를 받을 때 행하는 연비의식(燃臂儀式), 즉 밀밥 매긴 작은 실로 팔을 태우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작은 불씨가 태산같은 섶도 다 태울 수 있듯 한번 연비하면 다겁의 죄업도 일시에 녹는 공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속에 관계없이 받을 수 있는 보살 48계는 여러번 자주 받아도 되는 것이다.
 
(3) 십선계
 
  정식으로 계를 받지 않았으나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10선계도 있다. 이것은 5계와 10계를 우리 불자들이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십선(十善)으로 실천하도록 달리 표현한 것이다.
 
 ① 불살생(不殺生)을 방생(放生)으로 하라
 ② 불투도(不偸盜)를 근면(勤勉)으로 하라
 ③ 불사음(不邪淫)을 정음(正淫)으로 하라
 ④ 불망어(不妄語)를 정어(正語)로 하라
 ⑤ 불양설(不兩舌)을 진어(眞魚)로 하라
 ⑥ 불악구(不惡口)를 애어(愛語)로 하라
 ⑦ 불기어(不綺語)를 실어(實語)로 하라
 ⑧ 불탐(不貪)을 보시(布施)로 하라
 ⑨ 불진(不瞋)을 자비(慈悲)로 하라
 ⑩ 불치(不痴)를 지혜(智慧)로 하라.
 
불탐은 탐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배웠듯이 중생이 사는 세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종류로 되어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욕계로서 욕망에 의해 살아가는 중생계를 한다.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 욕심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도 절제하는 삶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의욕과 탐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탐욕은 지나친 욕심이지만 의욕은 삶을 이끌어가려는 기본적인 창조적 마음이다. 의욕을 잃으면 이는 병과 같아서 고쳐야 하는 정신병이다. 이와 같이 무의욕(無意慾)과 무욕(無欲)은 다른 것이다.
 
불진(不瞋)이란 성내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노는 인간의 원시성이며 야만성이다. 화로써 일을 해결하려는 것은 지신의 지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 화를 내지 않고 일을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상대방이 화를 내어야만 알아듣는 저능아가 되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불치(不痴)란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인생을 괴롭고 힘들게 만든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는 마음은 다 어리석음의 소산인 것이다. 우리가 불교에 입문하게 되면 부처님 말씀을 배워 깨닫게 된다. 그러면 모든 어리석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진 또 정진하는 것이다.
 
결국, 지계(持戒)는 몸과 마음의 뜻의 삼업(三業)을 잘 단속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악업을 조심해서 그릇됨을 막고 악을 멈추게 하는 섭율의계(攝律儀械), 한 단계 높여서 모든 선한 일을 남김없이 포용하여 실천할 것을 가리키는 섭선법계(攝善法戒), 그리고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포용하여 이익을 주라는 섭중생계(攝衆生戒)로 분류된다.
 
섭율의계는 자기의 악행을 막고 번뇌를 끊는 자리행(自利行)으로서, 삼귀의계부터 앞에서 설명한 계들은 대부분 모두 섭율의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섭선법계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한 것으로, 십선계가 섭선법계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인 섭중생계는 나의 이익이 아닌 중생의 이익에만 관여하는 이타행(利他行)이다. 이 세가지 계율정신을 대승불교에서는 삼취정계(三娶淨戒)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 불자들이 법회때마다 암송하는 사홍서원(四弘誓願)과도 관계된다.
 
즉, 섭율의계는 ‘번뇌무진서원단’ (모든 번뇌를 다 끊겠습니다), 섭선법계는 ‘법문무량서원학’ (법문이 한량없지만 기어이 다 배우겠습니다)과 ‘불도무상서원성’ (불도가 위없이 높지만 기어이 다 이루겠습니다), 그리고 섭중생계는 ‘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이 가없지만 기어이 다 제도하겠습니다)와 일치한다.
 
이와 같이 삼취정계는 대승불교 보살정신의 결정체다. 마땅히 우리는 이에 입각해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실천해서 온 세계를 불국토로 바꾸도록 깨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계율은 우리를 속박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해탈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매우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공(空) 사상에 의하면, 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곧 불교의 계율사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부득이 계를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파계(破戒)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 나를 먼저 자각하고 부처님 전에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를 해야 한다. 이러한 참회를 위해서 계(戒)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비로소 바라밀이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이 세우신 계율의 참뜻을 되새겨 진정한 지계행자(持戒行者)가 되어 지계바라밀을 성취하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십악업
십무기업
십선업
 
 
신삼(身三)
살생(殺生)
불상생(不殺生)
방생(放生)
투도(偸盜)
투도(偸盜)
근면(勤勉)
사음(邪淫)
불사음(不邪淫)
정음(正淫)
 

구사(口四)
망어(妄語)
불망어(不妄語)
정어(正語)
양설(兩舌)
불양설(不兩舌)
진어(眞語)
악구(惡口)
불악구(不惡口)
애어(愛語)
기어(綺語)
불기어(不綺語)
실어(失語)
 

의삼(意三)
탐(貪)
불탐(不貪)
보시(布施)
진(瞋)
불진(不瞋)
자비(慈悲)
치(痴)
불치(不痴)
지혜(智慧)
 

 
3. 인욕(忍辱) 바라밀
 
  인욕이란 참는 것을 말한다. 불교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박해와 멸시의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했다. 인도에서 ‘사바’란 잡된 것으로 뒤죽박죽 얽혀 있는 회잡(會雜)의 세계,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감인(堪忍)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렇게 사바세계에 태어난 이상 잡된 일로 시달리기 마련이기에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자는 이러한 것들을 참음으로써 바라밀을 행하게 된다. 인욕바라밀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심신의 어떠한 괴로움도 굳게 참고 좌절이나 원한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항상 자비심을 내는 것으로 진심(嗔心)을 없애는 바라밀이다.
 
그러나 인욕을 무조건적인 인종(忍從)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로운 인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육바라밀에 지혜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혜로운 인욕이란 현재 처한 고통스런 상황에 대해 한순간 돌이켜 생각해보고, 그리하여 고통이 우리가 과거에 지은 잘못으로 인한 업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여, 지은 업을 기꺼이 받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인욕행이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의 업은 녹아내리고 행복이 찾아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만의 능력이며 복덕이다. 즉, 다른 중생들은 업을 받기만 하지만, 우리 인간은 업을 받음과 동시에 새롭게 개척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인내가 뒤따른다.
 
보시바라밀의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의 셋으로 나뉘고, 지계바라밀을 섭율의계, 섭선법계, 섭중생계의 셋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듯이 인욕바라밀도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 내원해인 (耐怨害忍)
 
    자신을 해롭게 하는 자들의 악행을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② 안수고인 (安受苦忍)
 
    이것은 자신의 고통은 물론 다른 사람의 고통도 기꺼이 달게 받아들여 같이 해결하는 단계의 인욕행이다.
 
③ 제찰법인 (諦察法忍)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일에 대해 기쁨과 슬픔으로 동요되지 않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 을 깊이 관찰하여 평등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달리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도 한다. 법이 란 본디 공한 것, 무생이라고 하는 것,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참는것의 극치이다.

  살다보면 참을 수 없는 순간들과 부딪힐 일이 생기기도 하며, 때로는 억울할 정도의 분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서 무슨 일이든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하게끔 되어있는 그 무엇에 의한 인연임을 깨닫고 조용히 받아들여 인욕해야 한다. 짜증을 내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할뿐만 아니라 본인도 상하게 되어 온몸에 독기가 퍼져 병이 들게 마련이다.
 
업이니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참고 넘어서면 감정이 식게 되고, 그런 다음 후회없는 평온이 찾아드는 것이다. 결국 인욕이란 참을 수밖에 없는 사물의 도리를 관찰하여 마음의 동요를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인욕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역경과 분노가 잠재워질 수 있고 거기서 새로운 바라밀의 경지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4. 정진(精進) 바라밀
 
  정진이란 노력이며, 부지런히 힘쓰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정진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올바른 일을 꾸준하게 이루도록 노력하며, 밝고 바른 마음으로 중도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포기할 생각을 내지 말고 굳세게 실행하는 자세가 바로 정진이다.
 
승가에서는 용맹정진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선방의 결제기간중에 한숨잠도 자지 않고 7일 또는 3․7(21)일 정진에 들어간다. 잠을 깨우기 위해 얼음을 머리에 이고 정진하며 가시덤불로 몸 주위를 단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진은 단지 노력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정진을 쉬는 것도 정진이기도 하다. 이것은 석존이 수행하신 과정을 봐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걸렸던 길이 고행이었다. 아사(餓死) 직전의 단식 고행을 비롯한 온갖 고행을 다 하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행을 그치고 중도(中道)의 길을 선택하셨다. 고행은 일방적이며 맹목적인 것인데 이러한 노력으로는 진실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중도를 걸었던 것이다. 따라서 육바라밀의 정진은 중도를 바탕으로 한 노력이다.
 
 현대는 점점 더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어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선택한 삶에 대하여 수많은 갈등과 회의에 바질 때도 있다. 이런 방황의 원인은 나의 삶의 나아갈 바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때 일수록 우리는 더욱 삶의 중심을 다잡아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삶의 나아갈 지표를 수립하는 기본적인 결심이 필요하다.
 
이것은 크든 작든 원(願)을 세우는 일이다. 이 원(願)을 불교에서는 발원(發願), 서원(誓願), 행원(行願), 원력(願力)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발하는 것이기에 발원이라고 하고, 원을 세움과 동시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맹세가 뒤따르기 때문에 서원이라 하며, 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행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행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원을 이루려면 반드시 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원(願)과 힘(力)을 한마디로 원력(願力)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찍이 석존은 제자들에게 원(願)을 세울 것을 당부하셨다. 그 이유는 원이 바로 삶의 중심축이 되어 정진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원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정진하다가도 여러 장애를 만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고 권청(勸請)하며 수희(隨喜)하고 회향(廻向)해야 한다. 이는 원효대사의 말이다.
 
① 참회 (懺悔)
 
  참회할 때의 참(懺)이라는 글자는 두사람 (人人)이 진심(眞心)으로 잘못(非)을 인정하고 칼(戈)로 자른다는 뜻글자다. 즉, 두사람간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무명한 인생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잘못 실수할 수가 많다.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 결코 편치 못하다. 속으로 아무리 후회해보아도 소용없고 당사자를 만나 사죄를 구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 업장이 줄어들고 번뇌가 사라져서 정진할 수 있게 된다.
 
② 권청 (勸請)
 
  이것은 불보살님께 나를 비롯한 모든 중생을 구제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가족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4무량심(無量心)을 가져 진심으로 권청하는 일도 정진의 하나이다.
 
③ 수희 (隨喜)
 
  이 말은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일에 기쁜일이 있으면 시기하지 말고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열등감을 느끼기 보다는 자신도 정진하는데 촉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④ 회향 (廻向)
 
  회향이라는 말은 우리가 절에서 종종 듣는 용어인데, 스스로 지은 공덕을 다른 일에 돌린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보리회향과 중생회향이 있다. 우리가 행한 보시, 지계, 인욕, 참회, 권청, 수희한 공덕을 자신의 깨달음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면 보리회향이고, 중생구제를 위해 쓰이도록 하는 것이라면 중생회향이다. 결국 이 둘을 합치면 나도 깨닫고 타인도 깨닫게 되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이니, 보살도(菩薩道)는 회향과 더불어 조금씩 상승해나가는 것이다.
 
요컨대, 회향이란 내가 보시한 것이 나의 덕분이 아니라 다른 무엇의 덕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수많은 불사를 행한 중국의 양무제는 회향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에 집착하고 자랑스러워했고, 그래서 달마대사로부터 멸시를 당한 것이다. 회향이란 꼭 부처님 앞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 여신도님들도 시어른께 용돈 몇 푼 주고는 지나치게 생색을 내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참회, 권청, 수희, 회향을 잘하면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이 풀려나가면서 자연히 정정진(正精進)할 수 있게되며, 이로부터 바라밀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꼭 유의해야 할 것은 정진노력의 댓가가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되며, 사회전체에 환원(=보시)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가끔 볼 수 있는 무료의료봉사라든가 법률상담 등이나 다양한 형태의 자원봉사는 정진했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보람의 열매들일 것이다.
 

 
5. 선정(禪定) 바라밀
 
  (1) 선정(禪定)의 의미
 
  선정의 선(禪)은 범어댜나(dhyana)를 음역하여 선나(禪那)로, 이를 다시 줄여서 선(禪)이라 한 것인데, 보일시(示)와 홑단(單)이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다. 즉, 오로지 하나를 보라는 의미이다. 그 뜻은 고요히 생각한다 해서 정려(精慮) 또는 생각으로써 닦는다 하여 사유수(思惟修), 또는 생각을 가라 앉혀 정신을 집중시킨다 해서 정(定)이라 번역하기도 하며, 음과 뜻을 합쳐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정(禪定)이란 좌선, 집중, 삼매, 몰두 등의 뜻이 있고, 한자로는 적정삼매(適定三昧)라고 한다.
 
불교에서 선(禪)이라 하면 문자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곧바로 마음을 가리키고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 한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경전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글이 미치지 못하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체험으로써 터득되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 진정한 의미는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결코 문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게 아니다.
 
직지인심(直旨人心)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의미인데, 선(禪)이란 또렷이 밝은 우리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 마음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 행위자이다. 마음이 주체가 되어야지 대상이 된다면 벌써 그 본성을 잃은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 성불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본래의 성품은 밝음과 어둠이 없으며 대소가 없고 안팎이 없고 생멸(生滅)이 없다. 이는 바로 법신의 부처님과 하나되는 것이므로 성불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禪)이란 교리로써 표현될 수 없는 체험의 세계요, 문자에 한정 구속되지도 않고, 사람의 본심을 바로 가리키는 일이며 본심, 즉 본성을 보아 성불을 이루는 길인 것이다. 이러한 선(禪)의 수련을 통해 자타가 불이(不二)함을 깨닫게 되고 자기만 옳다는 소아적(小我的) 생각에서 벗어나 큰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부터 통일신라 말기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오늘날 서양인들에게도 선(禪)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일본어 발음의 젠(Zen)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교도의 명상법인 요가(瑤加)와 불교의 선(禪)은 엄연히 다르다. 이교도의 선(禪)이나 요가는 수행자가 선(禪)을 통해 범신(梵神)의 본성과 일체화되어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다. 반면에 불교의 선(禪)은 순수의식을 집중시켜 실상을 자각하고 반야(般若)를 얻어 해탈을 이루는데 있다. 석존은 설산에서 내려와 몸을 깨끗이 하시고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신 후에 우유죽 공양을 드시고 보리수 아래에 바른 자세로 앉아 심심삼매에 드셨다. 그리하여 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치신 것이다. 그래서 선정은 삼매(三昧)와 같은 말인 것이다.
 
 (2) 입정(入定) 수련
 
  대개 선정이나 좌선이라고 하면 정신통일만을 연상하지만 정신 집중도 선정에 속한다. 즉, 정신을 한 곳으로 몰두하여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한마음으로 정성을 모으는 일처럼 우리는 정신을 집중시키지 않고서는 무슨 일이든지 성취하기가 힘든 법이다. 일마다 번뇌망상과 잠이라는 마장이 끼여 선정에 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로 8만 4천가지 마장과 갖가지 유혹을 물리치고 고요한 마음에 머물게 되면 선정에 들게 된다.
 
수련 시 바로 집중되고 선정에 드는 사람은 진리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는 알기만 해서는 안되고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데, 중생들은 다겁의 습관이 남아있어서 혹 진리를 알더라도 실천이 쉽지 않다. 그래서 아는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선정에 드는 수련을 해야 한다. 수련할 때 번뇌망상과 잠에 휩쓸리는 사람은 아직 중생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대로 오직 하나에 몰두해 있는 힘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힘이 되는 것이므로, 불자라면 당연히 선정에 들어가는 수련을 생활화해야 된다.
 
 입정(入定)을 위한 것으로는 참선삼매, 염불삼매 등이 있는데, 참선삼매는 주로 스님들이 하시는 입정법이고, 염불삼매는 일반 불자들의 입정법이다. 흔히 선정은 우리에게 네 가지의 기쁨을 준다고 「잡아함경」에 나와 있다. 즉, 초선(初禪)으로 악이 사라지고, 이선(二禪)으로 선정의 기쁨을 맛보게 되며, 삼선(三禪)으로 무소유의 경지에 스스로 머물게 되며, 사선(四禪)은 무심을 얻게 한다.
 
卍. 참선삼매 (參禪三昧)
 
  ① 좌선
 
  참선은 몸과 마음을 고르는 수행법으로서, 일반적으로 좌선(坐禪)을 많이 택하여 수행한다. 좌선은 먼저 자세를 잘 가다듬어야 한다. 정좌하되, 가부좌를 틀거나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밑에 완전히 놓는다. 팔목은 허벅지와 옆구리 사이에 살포시 올려 놓되,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린 다음 엄지끼리 붙힌다. 그 다음 몸을 좌우로 살짝 움직여 고정시키고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당겨 머리를 수직으로 한다. 눈은 반안반개(半眼半開)하여 시선은 자기 앞 1.5m 정도의 전방에 자연스럽게 던져놓고 물체를 보지는 말고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혀는 입천장에 갖다 붙이고 침이 입안에 고이면 모았다가 삼킨다.
 
다음으로는 호흡을 고르게 해야 한다. 호흡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는데, 입은 다물고 코로 숨을 길게 천천히 들이 쉬어 배꼽 아래 3치(4.5cm) 지점인 단전까지 숨을 몰로 내려와 아랫배가 약간 볼록한 느낌이 들도록 들이 쉰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어 탁기를 내보낸다. 숨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얼마동안 들이쉬고 내쉬고 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다만 자신의 평상시 호흡보다 약간 느리게 하되, 지나치게 길게 해서 호흡이 힘들게 되어서는 역효과이니 주의한다.
 
즉, 자연적인 호흡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자세가 바르면 호흡은 느려지게 되어있으니 조급해 말아야 한다. 이러한 호흡을 단전호흡이라 한다. 속가에서는 이 호흡을 발전시켜 달리 응용도 하는 모양이나 불가에서는 일단 여기까지 순조롭게 되면 된다. 그 동안 가슴까지만 내려오는 짧은 호흡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제대로 쉽지 않다. 그러나 조금만 연습하면 단전호흡이 익숙해지고,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되면 다음으로 관(觀)을 해야 한다.
 
 관(觀)은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아무 생각없이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을 보는 수식관(數息觀)이 있다. 또는 들어오는 숨을 쉬며 하나... 하고 헤아리고 나가는 숨을 쉬며 둘... 하고 계속 반복하는 방법도 있다. 두 번째로 백골관(白骨觀)이라는 것인데, 사람의 외형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겨우 백골이므로, 이것을 보는 연습을 통해 사람의 근원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재로 여시관(如是觀)이 있다. 이는 부처님의 진리를 관하는 방법으로, 공(空)이나 불성(佛性), 사상(四相) 등을 하나 정해서 명상을 한다.
 
이처럼 관법(觀法)은 부처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수련해야 불법(佛法)에 어긋나지 않는 결론을 얻게 되는 법이다. 관을 잘하여 부처님의 눈과 같아지면 자연히 깨달음이 온다. 그러므로 초심자는 수식관이나 화두참구법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다.
 
② 화두참구법 (話頭參究法)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취하는 수행법이다. 화두(話頭)란 ‘말머리’라는 의미로 화(話)는 ‘말’이며, 두(頭)는 ‘공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즉, 우주의 이치를 가르치는 법의 말이다. 달리 공안(公案)이라고 하는데, 이는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공문서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던져진 풀어야 될 문제이며 삶의 의문이 바로 화두이다. 화두는 1,700여 가지가 있는데, 참선은 이 문제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좌정해서 명상속에서 푸는 것이다. 예컨대 제 1화두는 ‘이뭣고?’(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인데, 부처님이 명상하셨던 것이다. 화두는 다른 관법과는 달라서 마음을 헤아려 답을 찾는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래서 화두를 참구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혼침(婚沈)과 망상이다. 혼침은 산란하고 잠 오는 혼몽한 경계이다. 그래서 앉아있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망상과 혼침이 일어나면 수없이 오직 화두만 잡으려고 애써야 하며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성성(聖性)하고 깨끗한 상태로 무심속에 얻은 고요의 극치인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의심 하나만 갖고 답이 절로 나올 때까지 정진해서 이미 자신속에 있는 답을 발견하는 것이다. 막연히 기다리면 안되고 계속해서 자신의 본 성품인 자성(自性)에게 질문을 던져서 본성의 문이 열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 문이 열리게 되어있는 것이 참선이다.
 
③ 깨달음의 세 가지 조건
 
  참선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선정(禪定)을 이루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조건은 신심(信心)이다. 역대로 신심을 저버리고 불타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다. 나도 불성을 지닌 존재로서 깨우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 신심(信心)을 지니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불성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기도 하다. 부처님도 이 길을 걸어서 인생의 의문을 해결했고 역대 선사들도 이 길을 걸어서 평안을 얻은 것이다. 그 분들이 우매해서 출가하신 게 아니다.
 
오직 참 진리만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굳게 갖고 계셨던 때문이다. 이러한 신심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는 초발심이 발할 때 바로 정각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심은 한동안 일어나다가도 어느 순간 수그러들기도 한다. 그러다 또 재발심이 일어난다. 일생을 수행하다보면 재발심의 순간이 있다. 마치 바람이 강하게 불수록 나무뿌리가 더욱 단단히 박히는 이치처럼, 재발심이 있어야만 다시는 후퇴되지 않는 신심을 갖게 된다. 종국에는 진리에 눈을 떠야 신심이 퇴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인생에 대한 의심을 가지는 것이다. 의심이 없으면 진리에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의 연을 만나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철저한 의심을 통해 우주의 실상을 보게 되며, 의심이 크면 클수록 크게 깨닫게 된다.
 
화두참구에 있어서 의심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의심에 의해 지속적인 지구력을 갖게 되고 끝내는 답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두는 의심을 일으켜서 망상과 잠을 극복하고 고요하고 깊은 정신 세계에 들어가도록 한다. 이때에도 의심을 놓쳐서는 안되며 마침내 지혜가 발현될 것이다. 그래서 화두 그 자체를 선(禪)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화두삼매에 들어서 지금까지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안으로 모으게 되고, 종국에는 실상(實相)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조건은 용맹심이다. 오직 정진하겠다는 대용맹심을 가지는 것이다. 용맹심은 백수의 왕인 사자처럼 돌진력과 지구력을 길러준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삶의 문제를 푸는 것은 대용맹심이 아니면 이루기 어렵다.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라면 사자와 같은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일찍이 효봉스님은 흙돌로 문을 봉하고 1년 6개월을 답답한 토굴속에서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다 용맹심에 의한 것이다.
 
卍. 염불삼매 (念佛三昧)
 
  염불삼매는 주로 재가불자나 기도수행하는 스님들이 행하는 선(禪) 수련법으로서, 정신을 몰두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간절히 염(念)하면서 삼매경에 들어가는 방법이 참선삼매와 다르다. 그러나 얻어지는 효과는 참선삼매와 동일하다.
 
 염불이란 불보살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염불뿐만 아니라 경을 보는 간경, 불경을 읽는 독경도 포함된다.
 
염불은 참선과 달라서 언제 어디든지 자세와 관계없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염불할 시간과 대상을 정한다. 세계적으로 80%정도는 관음신행을 하니 아직 정하지 않은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간이 정해졌으면 간단한 경을 한가지 읽는 것이 좋으니,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 짧은 경을 읽고 난 후 108염주 등을 돌리면서 염불하도록 한다.
 
그런데 염불은 반드시 마음으로 불러야 된다. 그래서 염불은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가능한 작은 소리를 내어 송불(誦佛)도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염불하다가 이상하게 집중이 잘되는 시기가 오면 용맹정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무슨 공부든지 꾸준히 해야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염불도 마찬가지다. 너무 용을 써서 기운이 빠져 건강을 해치는 수도 생기니 조심하되, 일상중에 참선이든 염불이든 수행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육바라밀의 하나인 선정(禪定)을 통해서 삿되고망령된 마음이나 분별에서 나온 모든 번뇌를 쉬어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킴으로써, 마음이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또렷하게 안정된 가운데서 비로소 지혜(智慧)가 생겨나게 됨이니 오랜 수행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번 선정(禪定)에 들면 한번 부처님 나라에 드는 것이요, 하루 선정에 들면 하루 부처님 나라에 드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가 염불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주와 합일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6. 지혜(智慧) 바라밀
 
  육바라밀의 지혜(智慧)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통상 반야(般若)라고도 하는 것인데, 반야는 인도어의 프라즈냐아(prajna)의 음사(音寫)이며, 그 의미는 지혜(智慧)이다. 지(智) 또는 혜(慧)만으로도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참 모습을 보고 그 성품이 공(空)함을 비추어 아는 능력이다. 즉, 일을 잘 살피어 잘못되어지는 일이 없이 실천하도록 하는 작용이다.
 
우리는 지혜가 있음으로써 올바르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등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지혜롭지 못한 보시는 그릇되는 수가 있고, 지혜롭지 못한 지계는 하나를 지키려다 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우(愚)를 범할 수 있으며 지혜로운 인욕이랴말로 자연스럽고 지혜롭지 못한 정진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지혜로운 선정만이 항마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혜(智慧)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주는 요소이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자만이 다른 바라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이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지하기만 하여 나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우리 스스로 갖추고 있는 위한 능력을 개발하고 창조하는 지혜를 얻어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를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45년동안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사실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몸소 깨달으신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지혜(智慧)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이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남겨주시어, 불교에 입문한자가 대각(大覺)을 성취할 때까지 일생을 수행하며 공부하도록 하셨다.
 
육바라밀을 삼학에 견주어본다면, 사실 우리는 지계(持戒) 바라밀에서 계(戒)에 관한 내용을, 선정(禪定) 바라밀에서 정(定)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배운 것이다. 세 번째 혜(慧)는 육바라밀의 지혜(智慧)와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서, 계(戒)와 정(定)이 잘 이루어지면 혜(慧)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육바라밀의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을 통해 지혜(智慧)를 얻는데 도움받을 수 있다. 즉, 육바라밀의 구성요소들은 서로 보완관계를 가지면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바라밀도 다른 바라밀들을 끊임없이 실천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智慧)는 결코 이기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은 불교의 이타(利他)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비이며 수승한 지혜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앞에서 배운 팔정도(八正道)도 바로 지혜를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에 속하고,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정(定)에 속하며,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은 혜(慧)에 속한다. 또한 혜(慧)는 계(戒)와 정(定)을 올바로 행하는데 필요한 것이니, 결국 혜(慧)가 팔정도를 총괄하는 격이 되어 혜(慧)와 도(道)는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혜(智慧)를 얻는 길이요 방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삼학 또는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반야(般若)를 얻게 된다.
 
반야(般若)는 마음을 비움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무분별의 지혜이며, 공(空)한 지혜이고, 나아가서는 공(空)에 대한 집착마저도 초월한 반야일심(般若一心)의 진여(眞如)함에 이르는 궁극의 지혜이다. 그래서 삼학과 육바라밀의 궁극적인 목표도 다름 아닌 반야(般若)를 얻기 위한 실천인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터득하여 모든 것이 무상이요 공(空)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자문해 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진정한 해탈을 얻은 것이라고말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산다는 것은 인연 맺는 것이다.
 
좋은 인연이 맺어지면 다행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참고 정진해서 이를 잘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는 법이다. 반야선(般若船)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지혜(智慧)의 배이다. 우리도 지혜(智慧)를 잘 쓰다보면 저도 모르게 반야선을 타고 고통의 바다를 훌쩍 건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