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의 사찰(동화사,범어사,용주사,통도사,흥국사,직지사)
작성자 마이템플 등록일 08-03-16 13:44 조회수 1,073
 
 
팔공산 동화사

부처님 근처 불교문화
 
  대구에서 동북쪽으로 22㎞쯤 떨어진 지점에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날개를 펴고 앉은 팔공산(八公山) 비로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렸으며 북녘의 시루봉과 동남쪽의 염불봉․수봉․인봉․노적봉․관봉 등이 한준령을 폈고, 서쪽으로는 파계봉을 넘어 가다가 다시 방향을 북서쪽으로 꺾어 가산 다부원
을 거쳐 소야현에 이르렀다.
 
동화사(桐華寺)는 팔공산 남쪽 기슭 도학동에 앉아 있는 지은지 1491년이 되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 행정구역상의 지번(地番)은 대구직할시 동구 도학동 35번지.
 
 팔동산은 산정(山頂) 근처의 급경사를 빼고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수숫골․폭포골․학골․바윗골 등지를 흐르는 산수는 남서로 흘러 문암천에서 머리를 모았다가 다시 금호강으로 유입해 들어간다. 이와 같은 산수의 흐름을 돕는 산세 또한 기암과 괴석을 안아 변화많은 청암벽류의 계곡과 수림으로 빼어난 경관을 이루어 일찍부터 우리의 소중한 불교정신 문화를 표출해내서 이 지방 사람들에게 문화인으로서의 긍지와 명소로서의 자랑을 더디지 않게 했다. 

  동화사의 창건연대는 신라 21대 소지왕 15년(493).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이루어 처음에는 유가사(瑜伽寺)라 불렀다. 다시 42대 응덕왕 2년(832)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할 당시 겨울인데도 주변에 오동꽃이 아름답게 만발해서 그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사적기는 적고 있다.
 
도학동에서 18km쯤 남쪽으로 상거해 있는 대구는 낙동강 중류의 기름진 금호평야에 약 3천여년 전 취락이 형성되어 AD 1세기경에 달구화(達句火)라고 부르는 부족국가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신라땅에 속해 있었다. 대구라는 이름은 757년에 얻었으며, 1945년에 자치시, 1950년에는 자유 수호의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1981년 직할시로 승격 인구 1백80만이라는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대구에서 15분 간격으로 들어오는 시내버스를 의식하지 않아도 대구와 동화사는 이미 한 울 안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하촌(寺下村)을 지나 산구(山口)에 이르는 작은 시내를 가로건넜을 때 해는 서서히 서산으로 빠지고 나목들이 삼목(森木)처럼 울울하게 늘어서 있는 산곡에는 겨울산의 냉기가 산상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함께 번져내리고 있었다. 넓지 않고 산허리를 가볍게 안고 도는 산길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가. 일주문(一柱門)이 눈앞에 와 섰다.
 
 그 일주문에서는 그림같은 해탈교(解脫橋)가 올려다 보였다.  해탈교 앞에는 차(茶)를 파는 여인이 아무도 없는 겨울날 깊은 산골의 적요를 달래며 질화로의 불을 지피고 앉아 있었다. 자리에 나앉아 당간지주(幢竿支柱)와 금당선원(金堂禪院)에 어린 산안개를 바라보며 차 한잔을 청했다. 4년째 한 자리에서 차를 끓인다는 여인의 얼굴에는 세상을 사는 역겨움이나 못볼 것을 보아온 사나운 기운이 전혀 서려 있지 않았다.
 
역시 부처님이 계시는 근처의 산자수명과 참되고 부드러움을 좇는 불자(佛子)들의 호흡이 짙어, 자연스럽게 번져오는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그러려니 싶었다. 차 값을 치루고 해탈교를 건너 옹호문(擁護門)을 들어서면서 드높은 누각 봉서루(鳳棲樓)를 바라보니 훤칠한 동화사의 도량이 마음을 끌었다. 봉서루 밑으로 트인 돌계단을 올라 대웅전에 들어 불전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받아 태어나기 전의 내 참 면모는 무엇입니까?’ 약사여래불을 왼편에, 아미타불을 오른편에 하고 한 중앙에 거룩한 위용으로 정좌한 본존불을 이윽히 우러러 보며 마음속으로 밝고 밝으신 부처님께 물었다. 웅장한 건물의 처마끝에 걸린 풍경만이 이 준령을 쓸고 내려온 솔바람에 흔들려 고요를 깨뜨릴 뿐이었다.
 
원당(願堂)에서 나와 석축 위에 서니 눈안에 든 강생원(降生院) ․ 심검당(尋劒堂) ․ 원음각(圓音閣) ․ 봉서루(鳳棲樓) 등이 병풍같았으며 원당과 조금 상거하여 영산전(靈山殿) ․ 조사전(祖師殿) ․ 천태각(天台閣) ․ 산신각(山神閣) ․ 칠성각(七星閣) 그리고 크고 작은 11동의 요사(寮舍)등이 산촌을 이루었다.
 

 
팔공산의 숨소리
 
  태백산맥을 그 큰 맥락으로 하여 달려나온 팔공산은 해발 1192m 동화사의 숨결로 하여 영남의 명산으로 높은 이름을 얻었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동에는 은해사(銀海寺)가 서쪽에는 파계사(芭磎寺)가 각각 그 불심의 도량을 구축하고 있다.
 
 이 산정(山頂)의 동남쪽 능선 관봉에는 약사여래불이 앉아 천여 년을 한겨같은 미소로 하계 중생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고, 서쪽 능선이 끝나는 곳에는 아미타불이 앉아 정토발원(淨土發願)을 쉬지 않고 있다.
 
제2의 석굴암으로 회자되 이 아미타불은 겨레의 보배(국보109호)로 지정되어 찬연한 이곳의 불교문화재로서 변함없는 전승을 지속해 나오고 있다. 팔공산의 처음 이름은 부악(父岳)이었다. 그러다가 중악(中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세 번재에는 제천단(祭天壇)을 두어 공산(公山)이라고 했는데, 이는 신라때의 이름이다. 필공산은 이 제단(祭壇)에 팔간자(八簡子)를 봉안한 뒤로 붙인 네 번째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이때가 고려 예종때의 일이다.

  팔공산에는 큰 바위마다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온 산에 불상의 그림자와 그 아름다움이 산세와 어울려 장엄을 더하고 있으며 영남지방의 많은 주민들의 근본심성에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심어 많은 서민들의 정신적인 안식처와 종교적인 귀의처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을 고려 때 예종이 시행한 공식적인 국가적 행사로서의 기제(祈祭)실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핌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팔공산은 기제의식의 실현장이었다.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곳 동화사에는 많은 불교문화재들이 있어서 국보로, 혹은 보물지정으로 찬연한 불교문화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다. 팔공산 서쪽 능선에 앉은 국보 아미타불을 접어 두고도 동화사의 가까운 경내지에 보물이 다섯 점이나 산재해 있다.
 
신라 홍덕왕때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친히 정을 들어 조각했다고 하는 약사여래불상은 화강암에 새긴 마애불상(보물243호)으로 유명하며, 비로암석조 비로사나불좌상(毘盧庵石造毘盧舍那佛坐像:보물244호), 비로암 삼층석탑(보물247호), 당간지주(보물254호), 진평왕 4년에 대웅전 앞에 세웠다가 헌강왕 1년에 금당(金堂)으로 옮긴 금당암삼층석탑(金堂庵三層石塔:보물248호)등이 동화사의 도량을 빛내고 불교문화재들.
 
이밖에도 관세음보살의 친필이라고 일컫는 패엽경(貝葉經), 당대(唐代)의 요령(搖鈴), 구룡대 금강저(金剛杵), 관수대영남도 총섭인, 대종, 대법고 등 열 네가지나 되는 진귀불교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임진왜란시 승병을 지휘하는 데에 사용했던 나팔과 흡사한 「소라」와 영남 일대의 대소 사찰을 지휘하는데에 사용했던 영남도총섭인, 동화사총섭인 등은 사료(史料)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불교유품들이다.
산내 암자로는 부도암(浮屠庵), 내원암(內院庵), 양진암(養眞庵), 비로암(毘盧庵), 염불암(念佛庵), 약수암(藥水庵) 등이 있으며 경봉(鏡峰) 석우(石牛) 서옹(西翁) 향곡(香谷) 구산(九山) 월산(月山)스님 등 선가(禪家)의 조실(祖室) 스님들이 많이 주석했었다.
 

 
동화사의 숙원사업
 
  동화사는 금당(金堂)선원으로 하여 이름이 높다. 그것은 선원을 잦아드는 선객들이 구름같이 이 금당에서 머무르고자 함이요, 선객들은 두 변(二邊)에 떨어지지 않고 곧장 나아가 확실한 자기의 주인공을 찾고자 하는 죽순같은 마음을 매일같이 고쳐 지니면서 자기와 피나는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선(禪)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정(定)과 혜(慧)를 조화하는 수행이다.
 
선을 하지 않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이 선을 통해 정각의 문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변(邊)에 떨어지지 않고 곧장 가다가,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발 붙일 데 없는 곳에 이르러 무위인(無爲人)을 만나, 그 사람이 바로 본래의 자기임을 확인하는 수행이 곧 선이다. 그래서 금당이 없는 동화사는 좀처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정화 이후 역대 주지들, 즉 정성문(1대), 배응연(2대), 이범행(3대) 최월산(4대), 소구산(5대), 김서운(6대), 김향곡(7대), 권혜종(8대), 이현칙(9대), 손경산(10대), 이자신(11대), 서의현(12대)등의 모든 스님들이 금당선원의 운영과 발전에 심혈을 쏟았다.
 
이화 같은 노력의 면면한 이어짐 속에서 한국의 선원하면 그 가운데 꼭 금당선원이 꼽힐 만큼 눈푸른 납자(衲子)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그런 금당선원이 이번 동안거 결제를 하지 못했다.
 
 “선원의 당우(堂宇)가 퇴락하여 비가 새는 형편에 있기 때문에, 내년에 완전한 보수를 끝내고 개할 계획입니다. 선원을 비워두는 마음 매우 아픕니다.” 지난 12월 10일 수덕사(修德寺)에서 열린 본사 주지모임에서 본사 주지 친목회장으로 뽑힌 바 있는 서의현(徐義玄)동화사 현 주지스님의 얘기다.
 
 이 세상에서 지극히 아낄 것 하나를 누가 이야기 하라고 한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말한 의현스님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자유를 누릴만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자유인이 되어야 된다고 말했다.   “선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수행이며 스스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여 해탈을 유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금당선원의 의미는 매우 높고 크다고 생각합니다. ”
 
 서의현스님은 사람들이 깊은 산 속에 앉아 있는 산사를 찾는 것은 진실로 자기에게 있어서 지극히 아낄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만일 그런 것이 없어 아무렇게나 지내온 삶이라면, 조용한 심산의 부처님 곁에 잠시 앉아 있으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자기의 생애에서나마 지극히 아낄 것 하나쯤마음속에 간직해 돌아가고자 함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산사를 지키는 산승은 가람을 수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참된 사람의 행로에 대해서 별다른 느낌이 없이 되는대로 삶을 열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명확하게 들려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소임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사실 바르고 옳은 지적이다. 부처님이 계시는 산사에는 속인들이 속진(俗塵)을 씻고 진실로 우리가 누리는 삶을 통해서 정당하고 의로움을 추켜세워 나갈만한 힘을 제공받는 본심을 맑게 간추릴 수 있도록 따스한 손길을 펴 주는 도량이다.
 
“ 그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곧 포교의 뿌리입니다. 본사와 말사 간의 모임주선이나 대내적인 종무행정의 바른 추진도 빠뜨려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런 일은 지엽적인 일이고 우선적으로 빠뜨려서는 안될 선무(先務)는 곧 뭇사람(衆生)을 만나 본심(一心)에 돌아가도록 길을 안내해 주는 노력입니다.”
 
서의현스님은 그와 같은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자 대구시 신암동에 정법사(正法寺)라는 포교당을 개설했으며 청년학생들이 거리감 없이 불교에 접근할 수 있는 불교센터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음도 비췄다.
 
대구직할시가 바로 문앞에 있으니, 이곳을 불교포교의 전진기지로 해서 부처님의 가리침을 널리 펴 나가겠다는 강력한 신념을 내보인 의현스님은 우선 성도제일행사를 대구실내체육관을 빌어 일반불자의 동원에 힘쓰겠다고 한다.
 
“금년까지 70여개 말사의 미등록 망실재환수에 힘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 불자들의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이나 일반신도들의 자녀교육을 위한 학교교육기관의 확충에도 있는 힘을 다 쏟아보고 싶습니다.”
 
 우선 능인(能仁)학원의 기틀을 다져 내년에는 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며 유치원과 양로원도 개설하여 지역주민과 애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포교활동을 전개하겠다고 의현스님은 말했다.
 

 
금정산 범어사

호국의 터 금정산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의 명패를 지닌 범어사(梵魚寺)는 1천6백여년의 세월동안 민족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면면히 담당해 온 한국불교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미래를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대찰(大刹)이다.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가 행정상 범어사의 구역을 가름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금정산 범어사라 함이 제짝을 맞춰서 따라다니는 범어사의 소재지다. 금정산은 금강산 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는 추가령 구조곡에서 갈라져 나와 한반도의 등뼈를 이룬 태백산맥이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치달아 이루어 놓은 산이다.
 
산의 주봉은 범어사 뒤쪽으로 솟아 올라있고, 줄기와 부리는 서쪽으로 김해, 남쪽으로 동래, 북쪽으로 밀양과 동쪽으로 울산에 각각 면해있다. 해발 796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금정산은 얼핏보아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부산 시민들에게는 한없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호국의 얼이 담긴 산이요, 빗물을 정화시켜 생명수를 제공하고 온갖 자연스러움을 뿜어내며 게다가 범어사를 보듬고서 길게 뻗은 부산의 선봉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금정산은 동래구와 금정구에 속해 있다. 동래하면 부산의 옛 중심지로서 통일신라시대부터 동래군이라 불려 경상남도 끝 지역의 행정, 산업, 교통, 문화의 주축을 이루던 곳이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알려지기 시작한 부산이 새로운 행정단위로 부상, 동래를 흡수해 버렸지만 나이 지긋한 동래 토박이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부산은 동래군에 딸린 ‘배닿는 자리’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동래는 긴 역사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곳이다.
 
금정산을 포함한 동래에 호국의 얼이 담겼다고 함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을 부수고 동래로 쳐들어온 왜군이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길을 빌려내라’며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자, 동래 부사 송상현은 ‘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송상현을 포함한 천 여명이 넘는 관군이 목숨을 바쳤던 것을 말한다.
 
또한 불살생의 파계를 감수하며 나라와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서산대사가 승병을 거느리고 왜적과 맞서 싸운 곳이며, 삼일운동때에는 범어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한용운 선생의 지시에 따라 ‘범어사 학림의거’라는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던 곳이니 그들의 죽음은 해방 46년을 맞는 지금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비켜달라고 한 요구가 핑계라 할지라도 동래는 실제로 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교통의 요충지였음이 분명하며 동래에 있어 또 하나의 자랑거리인 온천은 지금도 부산의 관광명소로 손꼽히는 유명세를 발휘한다.
 
 조상들의 호국의지의 맥을 잇고 있는 동래산성을 내쳐두고 범어사를 향해 오르는 길은 걸어 들어갈수록 푸근하고 넉넉한 가슴을 갖고 있다.
 
천년 세월을 하루같이 불국토의 토대역할을 해온 공덕을 아련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일게다. 한 핏줄을 이은 후손으로서 조상과의 정신적 교감을 이룰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범어사로의 행로는 팔송거리로 이름 지어진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옛날 이곳에 소나무 여덟그루가 보기좋게 어우러져 정자를 이루었다는데서 연유한 팔송에서부터 범어사 입구까지 약 4km. 토산과 암산이 잘 조화되어 있는 금정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동래민요 ‘큰애기’에서 ‘작으나 크나 알백이’라 노래할 정도로 고장을 풍요롭게 했고, 약수터 또한 군데군데 14곳이나 있어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주는 감로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천혜의 수질과 토양은 온갖 꽃과 나무를 무성하게 자라게 하여 금정산을 봄부터 토실토실 살찌운다. 특히 바위 틈에서 뿌리를 내리고 용트림하듯 돌아 오른 범어사 계곡의 등나무떼는 백 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며 천연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어 보라색 꽃을 활짝 피울 5월을 준비하고 있었다.
 
필요에 따라 당연스레 귀결되는 편리함은 차량으로 채 10분이 안되어 범어사 입구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팔송거리를 지나치다 운좋게 범어사로 행하는 승객을 태우고 금정산을 오르게 되는 날은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는 택시운전사의 말이 실감나는 그런 길을 따라 다다른 범어사 입구는 추운 날씨 탓인지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금빛 우물 속의 범어(梵魚)
 
  범어사의 창건은 많은 이견 속에서도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신라 문무왕 18년(678) 의상(義湘)에 의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다. 의상이 당으로부터 귀국한 후에 창건을 보고 그의 제자 표훈(表訓)등이 주석했던 범어사는 조선조 숙종26년 범어사 창건 사적(梵魚寺 創建 事蹟)을 통해서 그 연원을 살펴 볼 수 있다.
 
당 문종 태화(唐 文宗 太和)9년 우리로는 을묘 신라 흥덕왕(乙卯 新羅 興德王) 때의 일이다. 일찍이 왜인은 10만 병선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대왕은 근심으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이 지내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시오. 태백산중에 의상이라는 한 화상이 있는데 금강보개여래제칠후신입니다.
 
항상 성중1천(聖衆一千), 범중1천(梵衆一千), 귀중일천(鬼衆一千)의 3천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 그리고 제신 및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한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아 7일 밤 7일 낮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화현하고 보현, 무수향화동자, 사십법체제신과 천왕을 거느리고 동해에 임하여 제압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 갈 것입니다.”하고는 사라졌다.
 
왕이 놀라 깨어나서 곧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 친히 함께 금정산에 이르러 7일 밤 7일 낮을 일심으로 독경한 결과, 왜선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왕은 의상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삼고 금정산 아래로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산정(山頂)에 위치한다는 금빛 우물이 바로 금정산의 명칭이 되었고 범천의 금어가 범어사의 이름이 되었으니, 천여년 동안 금정산 범어사라 불리는 근거가 되는 이러한 창건설화를 자신의 이해범주를 벗어나고 있다고 해서 그저 황당한 옛날 이야기쯤으로 치부해 버릴 것인가?
 
정신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일부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응집력의 표출로 볼 수 있다면 또한 정신문화의 향유를 공감하는 여유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창건기록도 허무하게 범어사는 임진왜란때 크게 불타버려 그 후 10여년을 폐허로 남아 있었다. 선조 35us(1602)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을 하였으나 곧 또다시 화재로 불타 버렸으니 계속된 비운은 이것으로 끝이 나고 광해군 5년(1613)에 현감(玄鑑), 묘전(妙全), 계환(戒環)등의 스님들이 중창을 계속해 나와 오늘에 이르렀다.
잘 자란 청송 사이로 범어사의 사격을 나타내주는 높이 4m 가량의 당간지주가 보이고 곧 44o의 돌기둥이 굳건히 받치고 있는 조계문이 눈앞에 다가선다.
 
선찰대본산 범어사 일주문의 정면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천왕문과 불이문, 보제루, 대웅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종으로 단을 높여가며 정열하고 있는데, 이는 화엄십찰에 속하는 해인사, 화엄사, 부석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높은 석계를 마련하고 다시 높은 대(臺)위에 불당을 세워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엄학의 실천
 
  한국의 불교사상사를 정립시키는데 초점 역할을 한 화엄학. 화엄학은 일찍이 신라의 자장(慈藏)에 의하여 도입되었고, 자장에 의해 소개된 화엄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신라땅을 풍미하게 된 데는 의상의 공로를 으뜸으로 평가하고 있다.
 
원효와 함께 도당유학을 절실히 염원한 의상이 원효의 귀국에도 불구하고 도당을 시도한 것은 오로지 중국화엄의 대가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범부는 현실에 묻혀 살면서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망각하며 살기 쉽고 거꾸로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면서 현실을 외면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화엄의 세계는 그것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것은 전체와 개체, 동질성과 특수성 성취와 자기희생의 원융이론인 화엄의 정신이 실천으로 옮겨졌다는데 그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의상에 있어서 불교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더 역점을 두었던 것이니 그 생명력은 찬연했다.
 
또한 의상이 그의 십대제자 가운데 진정(眞定)의 어머니를 위하여 화엄법회를 열고 추동기(錐銅記)를 저술하게 한 연기도 이러한 실천적 기풍의 좋은 실례가 되고 있다.
 
신라의 생활화된 화엄학을 널리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한 범어사는 지금도 그 정신을 이어나가는데 게을리 하고 있지 않다. 화엄의 정신을 잇고 있는 범어사의 무거움은 금정산 곳곳에 자리한 산내암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삼기(三奇)와 팔경으로 인하여 무겁지만은 않은 흥미와 운치를 전해준다.
 
삼기란 원효암 뒤편 암석이 매우 기묘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원효석대와 암탉과 수탉의 모습을 한 암석이 있었다는 자웅석계(雌雄石階), 창건설화와 함께 전해지는 바위 위에 금빛 나는 우물인 암상금정(岩上金井)이 그것이다.
 
팔경은 금정산 주위의 아름다운 풍치 여덟을 말하는 것으로 어산교 주변의 울창한 노송의 아름다운 경치가 첫째이고 계명암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운치가 두 번째이며 청련암 주위의 울창한 대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나그네가 되어 청련암 객사에서 밤에 듣는 운치를 세 번째로 꼽는다. 네 번째는 계곡에 빽빽하게 박혀있는 자연석 무더기를 대성암에서 내려다 본 모습과 자연석 밑으로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이 그것이고 다섯 번째는 내원암에서 저녁예불을 기다리며 큰절에서 치는 은은한 종소리 속에 깊어가는 선사들의 선정. 여섯째는 가을하늘 아래 붉게 물든 단풍이 금강암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고, 일곱 번째는 의상스님이 앉아 공부하던 석대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대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금정산 고당에서 흰구름이 산허리를 감고도는 선경이 여덟 번째를 차지하니 사철 조화로운 변화를 이렇듯 느낄 수 있는 심미안이 부러울 뿐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 진정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범어사의 선풍(禪風)
 
  근자에 들어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으로서의 이름을 높이 하고 있다. 이는 무애도행(無碍道行)으로 유명한 경허선사가 금강산의 유점사 석왕사와 해인사 등지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다 만년에 금정산 범어사로 발길을 돌려 선원을 짓고 후학을 지도했던 것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선풍을 두고 이르는 것이다.
 
 또한 탁월한 지도력과 당대의 선지식으로 명명을 드날린 동산(東山)스님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산스님 하면 범어사를 떠올릴 만큼 그 인연이 지중하다. 바로 범어사의 금어선원에서 대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근세 혼란기의 불교계를 이끌던 큰스님 중의 한 분인 동산스님의 법맥은 작년 열반에 드신 지효스님으로 이어져있고 현재까지 범어사의 선원은 승속의 주목받은 바가 되고 있다.  대웅전 앞뜰의 3층석탑을 천천히 돌아나오다가 문득 지혜의 날카로운 칼을 찾는 수검(壽劍)의 푸른 눈빛과 마주친 것은 범어사 순례의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성황산 용주사

1.  변화 없는 일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자기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미줄 같이 끈적끈적한 응집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하거나 새로울 것이 없는 생활이라는 이름의 기관차는 한시도 쉬지 않고 연료를 먹어치우고 있기 때문에, 기름이 바닥나서 움직임을 멈추게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연료를 공급해야 하고, 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화부들과 기관차라고 하는 고정된 환경에서 스스로 지치지 않도록 일어서야 하는 끈질긴 자기 관리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힘이 따지고 보면 변화 없는 일상이 전해주는 응집력에서 파생된다.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범벅을 이룬 우리의 일상은 그것이 바로 무질서한 혼돈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 도망가지 못하도록 우리들의 발목을 묶어 놓고 있다. 복날에 지쳐 있으면서도 복날로 인해서 혹서를 실감하듯, 인정사정없이 소비를 계속하는 일상 때문에 우리는 벌이를 위해서 궤도를질주해 가며 일상이 주는 아픔을 통렬하게 실감한다.
 
그러다 언제쯤인가 불현듯 이 일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인 화부들 곁을 떠나 불시에 인적이 끊긴 바다 끝이나 무인 고도에 나가 서고 싶다.
 
이것이 일상에 빠져 허덕이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씩 자기가 있던 곳을 몰래 빠져나와 전혀 낯이 익지 않은 외지로 길을 떠난다.
 
하얀 갈대꽃이 너울거리는 산정이나 짙은 물안개로 지척이 잘 분간되지 않는 무율(霧律)에 찾아가 혼자로 서서 낭인처럼 스적스적 걸어보는 것은 열기로 벌겋게 가열된 일상을 차가운 바람으로 한번쯤 식혀 주는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2.  성황산을 향해 떠나던 날 아침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림(碑林)에 내리는 겨울비를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융릉(隆陵)에 닿은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 처음에는 현륭원(縣隆園)이었다가 1899년에는 융릉(隆陵)으로 추봉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원침(園寢).
 
겨울비가 내리는 율릉 근처에는 인적이 없었다. 겨울날에 누가 와서 능침을 보고자 할 것인가.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화산(花山)의 원침은 처음에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했고 또 그 위치도 화산이 아닌 양주 배봉산에 있었다. 이 융능의 주인인 사도세자는 1735년 영빈 이씨와 영조의 사이에서 태어나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그 세수를 자연스럽게 누리지 못하고 비운에 목숨을 잃은 한이 많은 왕자이다.
 
효장세자 견(絹)이 영조 즉위 5년인 1726년 11월, 불과 열 살의 소년으로 요절하고 난 후 영조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영조는 40이 넘어서야 왕자를 얻었다. 이 왕자가 항(恒)이다. 왕자의 자는 윤관(允寬)이요, 호는 의제(毅斎)였다. 늦게 얻은 왕자이기 때문에 태어난 지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의제는 10세에 당시 영의정이었던 홍봉한(洪鳳漢)의 딸 홍씨와 결혼했다. 그녀가 바로 혜경궁 홍씨이다.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이름을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말려들어 뒤주 속에서 목숨을 잃은 비운의 세자가 되었다.
 
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자책봉이 되고 영조가 죽고 난 뒤 홍국영의 힘을 입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정조이다. 정조가 즉위하게 되자 박명원(朴明源)이 상소를 올려 영우원을 손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수원 화산에 길지를 잡고 원침을 현융원이라고 하고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왕이었다. 정조는 틈틈이 장헌세자의 능침이 있는 화산에 이르러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어느날 성황산 기슭에 있는 갈양사에 들러 한 스님이 부모은경을 강의하는 강설을 들었다. 그리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조는 화산 현융원 근처에 있는 이 절을 크게 중수하여 현융원의 원리(願利)로 삼고자 했다. 정조는 1790년 보경당 사일(寶鏡堂 獅馹)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道化主)로 삼고 성월당 철학(城月堂 哲學)스님을 부화주(副化主)로 삼아 팔도 관민의 시전 8만7천냥을 거두어 대웅전을 크게 짓고 대소 요사를 정비했다.
 
정조는 친히 봉불기복게(奉佛祈福偈)를 내리고, 단원 김홍도로 하여 불화를 그리게 했다. 상량문(上樑文)은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낙성식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등천하는 꿈을 꾸었다. 정조는 장헌세자의 원찰인 이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현융원의 원찰로 중창된 절이 바로 성황산의 용주사이다. 2백여년 전인 정조 14년, 1790년의 일이다. 갈양사(葛陽寺)가 용주사로 바뀐 것이다.

3.  융능에서 발길을 돌려 성황산의 용주사 경내로 들어섰다. 겨울비에 함초롬히 젖은 용주사는 특이한 정취를 안고 있었다. 경내에는 하얀 잔설이 여기저기 뭉쳐 있었다. 매표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각들은 흩어지는 운무 속으로 농담이 짙은 한 폭의 동양화와 같았다.
 
 천보루(天寶樓)앞에 서 있는 석탑은 기복사로 되기 전인 고려때의 석탑 같았다. 이 절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지만 고려 광종때 혜거국사(惠居國師)와 지광선사(智光禪師)가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간단한 기록이다. 석탑은 아마 그 때의 유물인 듯 했다.
 
 ‘지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하고 음각된 화강암이 불숙 얼굴을 디민다. 이곳이 선문임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중앙선원(中央禪院)을 개원하면서 아마 이 도량에 들어서는 사람은 부질없이 지혜 따위를 가지고 덤벼들지 말라는 뜻으로 돌에다 그런 글귀를 새겨놓은 모양이다. 아무리 막존지해(莫存知解)라고 해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비정한 부정(夫情)이다.
 
  아들을 죽인 아비.
 그것은 아비를 죽인 아들보다 더욱 비정하다. 그것은 인륜에서 벗어난 패륜이다. 아비가 얼마나 우매하면 간신이나 처첩이나 화완 옹주 따위 아녀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서 다음 대의 보위를 이어나갈 세자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말인가. 참으로 비정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우리 주변에서도 죄 없이 모함에 빠져 고통을 겪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란 그런 것인가. 눈이 밝거나 지혜가 있거나 숙지(熟知)를 지니고 있는 사람보
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들고 일어나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 넣는다. 역사는 그래서 아이러니이다.
 
 아비의 비정이 아니었더라면 정조가 그만한 효심을 지닐 리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이처럼 장엄한 용주사가 들어설 리도 없긴 없다. 참으로 장엄하다. 거대한 요사와 고루 누각, 대웅전도 웅장하다. 삼성각(三聖閣), 효성전(孝聖殿), 지장각(地藏閣), 종각(鐘閣), 선원(禪院), 요사(寮舍) 등이 모두 은성하다.
 
초창은 신라 문성왕 6년이라고 하며 명거스님이 갈양사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 있는 건물들은 2백여년 남짓 되는 연륜에 눌려있는 건물이다. 이 절을 부모은중경 도량이라고 해서 효사상과 깊은 연관을 짓는 것은 다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침을 화산에 옮기고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에 대해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8도 통찰사라는 직책을 하사, 대가람 증축에 나섰기 때문에 효의 도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효심과 부모은중경과 보경스님의 설법이 서로 인연으로 만나 이 도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효의 도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융능과 용주사가 있기 때문에 정조가 이 화성의 화산을 자주 찾아 왔고 정조의 거듭되는 행차로 지지대도 생기고 수원성도 크게 가꾸어졌다.
 
용주사에는 그래서 은중경을 새긴 목판, 동판, 석판이 오늘에도 단정하게 보존되어 온다. 목판과 석판에 새긴 글씨는 채제공(蔡濟恭)의 글씨이다. 당대의 명필이라고 한다.다생부모십종대은도(多生父母十種大恩圖)까지 동판에 새겼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귀중한 문화재가 되었다.

4.  용주사는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법(寺法)에 의해 31본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895년 도성출입이 열리고 난 후, 불교는 오랜 기간의 칩거에서 벗어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다가 1904년을 전후해서 변화되기 시작한 국내외의 거센 격랑에 휩쓸려 모처럼 맞이하게 된 자주적 행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강화조약을 맺고 5년 후인 1910년 보호조약을 체결, 우리는 일본에 합방되고 만다. 따라서 1911년은 일제가 본격적인 침탈의 발톱을 세우게 되는 해이다.
 
일제는 사사 관리법(寺社管理法)을 제정하여 31본산을 두고 총독이 직접 본산 주지를 임명한다. 강대연(姜大蓮)스님은 이때 본산인 용주사의 초대 주지가 되었다. 또 전국 5규정소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하기도 했다. 본산인 용주사는 수원, 안성, 죽산, 남양, 용인, 고양, 시흥군 등지에 있는 48개 사찰을 관할했다.
 
1945년까지 31본산의 하나로 지내오다가 1955년에 이르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가 되었다. 이는 1954년 일어난 불교정화운동의 여파로 이룩된 새로운 종단체제정립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었다. 이때는 수원 안양 2시와 화성, 시흥, 평택, 안성, 용인, 이천, 여천 등 7개군의 60여 사찰을 관할했다.
 
용주사는 1965년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새로운 주지로 김관응(金觀應)스님이 부임하면서 학인들을 모아 강원을 열고 부족한 인재의 육성에 솔선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해 나갔다.
 
김석우(金石牛)스님의 뒤를 이은 성희변(成喜變)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동국역경원역장을 열었다.희섭스님에 이어 김도광(金導光)스님이 잠시 주지로 있다가 당대의 고승인 정전강(鄭田崗)스님이 주지로 부임했다. 전강스님은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개설하고 많은 학자들을 모아 선수(禪修)의 길을 열었다.
 
전강스님은 8․15광복에서 6․25전란으로 이어지는 전환기에도 선수행에 전력하여 학자들을 모아 길을 열어줄만한 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실질적인 고승이었다. 전강스님의 뒤를 이어 송담(松潭)스님이 주지로 부임, 노사(老師)의 유지를 이어 선원을 이끌었다. 10년간을 묵언으로 일관하며 공부에 전념했던 송담스님은 전강스님의 수제자였다. 송담스님의 뒤를 이어 정무(正無)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용주사는 많은 변모를 가져왔다.
 
여러 가지로 포교사업을 펴고 불사도 일으켰다. 부모은중경탑을 건립하고 수원지역의 포교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정무스님의 뒤를 이어 7년 전에 정대(正大)스님이 8대 주지로 부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대스님이 주지로 부임, 용주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기미가 도량에서 역력히 느껴졌다.
 
사원은 기원보다는 말씀의 도량이요, 수행의 도량이다.말씀은 부처님의 말씀을 밝게 해석하여 중생들에게 주는 정신적인 은전이요, 수행은 부처님의 법을 이어나가는 제자들이 안으로 안으로 정신을 승화시켜 나가는 향상일로의 과정이다. 마침 성도절을 앞둔 날이라서 용주사의 경내에는 오가는 신도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글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았다.
 

 
영취산 통도사

1.  인간은 각자에게 있어 거의 비슷한 각도의 시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며 그에 준한 행동으로 타인과 발맞추어 살아가고 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시야를 넓히려 애써보지만 한 번에 모든 것을 조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야가 전방을 향해 있으면 후방은 나름대로 상상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시야에 의해 갇혀진 좁은 세상을 뛰어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고 이러한 초월적 행동은 의지만으로도 할 수 없는 용기와 신념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시야 밖인 미지의 세계에 대한 판단이 신념을 갖기 위해서는 축적된 복덕이 지혜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지식들의 존재를 과거로부터 소급해 보는 일이 있다.
그러한 선지식들의 출현은 인류역사의 물줄기를 가름하는 커다란 힘을 표출해 냈던 것이다.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낮은 자리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에 비해 훨씬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 분야에 있어서 첫 장을 열었다는 것은 그래서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추앙받게 되는 것이다. 신라시대 산이나 큰 강 하나만 가로막혀도 별개의 세상으로 취급되던 그 시절, 머나먼 이성(異城) 당나라에까지 가서 석가여래의 사리와 친착가사를 모셔다가 금강계단을 세우고 처음으로 불가의 계율을 가르쳐 이 땅에 청정한 승풍의 초석을 다지 자장율사(慈裝律師). 그의 의지가 조개 안의 진주처럼 찬연한 결정체로 남아있는 통도사를 찾았다.

2.  경부고속도를 따라서 한참을 내려오다 경상남도 땅에 이르러 언양을 지나면 곧 통도사 인터체인지가 눈에 들어온다. 오로지 통도사를 찾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첫 번째 관문이며 무수한 발길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통일신라 문무왕때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와 경상남도 창녕 땅을 조금씩 떼어 만든 삽량주가 여러차례 이름을 바꿔오다가 조선 태종때에 이르러 양산이란 이름을 얻은 곳.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과 동해바다를 옆구리에 끼고서 정족산맥의 여맥이 고도를 낮춰가며 자리잡은 양산에 통도사는 자리해 있다.
 
대가람으로서 필요했을 영산(靈山)의 정기는 양산군의 북쪽 끝 높이 1천 50미터의 영취산이 그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다. 취서산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의 사방으로 벋은 줄기 중 남쪽의 한 기슭에 통도사는 자리잡고 앉았다.
 
당당히 솟아있는 영취산문을 통과하고 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차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왼쪽으로 난 길과 통도팔경중 무풍송림(無風松林)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오른쪽 길. 영취산의 정기를 함초롬히 머금고 잘 자란 소나무 숲은 점입할수록 가경이다. 10분쯤 걸어가야 하는 이 길은 세속에서 묻혀온 온갖 때를 벗겨 통도사의 일주문 앞에 청정한 모습으로 이르게 해준다.
 
오른쪽으로 통도사 사적비가 보였다. 신라 성덕왕 인평 3년 신갑(丙甲)에 자장율사가 당에 가서 청량산(오대산이라고도 함)의 문수상 전에 7일 정진하고 석존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와 불정골(佛頂骨), 불지절(佛指節), 불사리(佛舍利), 패엽경(貝葉經) 등을 받아와 인평 13년에 왕과 함께 취서산 아래의 독룡지반(毒龍池畔) 못을 메우고 절을 지어 금강계단을 쌓고 가져온 사리의 3분의 1과 두골 가사를 봉안하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자장율사는 본래 진한의 진골출신으로 소판벼슬을 지낸 무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늦게까지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그의 부모가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관음에게 지극으로 기도하면서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불교계의 지도자로 만들겠습니다”라고 축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에 들어오더니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었고 석존의 탄생과 같은 날에 자장을 낳았으니 그 이름을 선종랑(善宗朗)이라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자장이 부모의 축원대로 불교의 지도자로서 성장하는 계기를 만나게 됐다. 다름 아닌 자신의 탄생을 그토록 염원하던 부모가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생의 무상함을 느낀 그는 불법에 귀의를 결심했고 자신이 거처하던 곳마저 원년사(元寧寺)란 절로 고치고 홀로 깊숙한 곳에 살면서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참으로 혹독하고 열렬한 수행정진을 해나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출가자로서의 계율에도 철저했으니, 조정에서 그에게 대신의 자리를 조용하기 위해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취임치 않으면 목을 베리라”는 왕의 조칙에도 율사는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응수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기까지 하다.
 
이미 그때부터 그는 천인(天人)으로부터 계를 받고 그 계율을 많은 출가자들에게 수계하고 있었던 것이니 그 당시 입산만으로도 승려로서 인정하였던 풍토가 그에 의해 확고한 체계와 형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덕영왕 즉위 5년 당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의 수행은 당태종의 위무를 받을 정도였고 선덕여왕 역시 당태종에게 그를 돌려보내 달라고 할 정도였으므로 그가 신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것인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당의 청량산에서 기도 끝에 문수보살로부터 가사와 사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문수보살은 이를 모실 자리 즉 통도사의 위치까지도 선정해 주었다 한다.
 
온 서라벌의 환영을 받고 귀국한 그는 우선 국찰 분황사에서 대승론과 보살계본을 강술하여 신라불교의 맥박을 뛰게 하였고 그 후로 유학시절 문수보살에게 지시받은 바를 행하기 위해 신라 산야를 헤매다니다 지금의 통도사 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구룡소에 사는 용을 하늘로 승천시키고 못을 메워 “통제만법 도제중생(通諸萬法 度濟衆生)”의 통도사 대가람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통도사의 창건설화를 뒷받침하는 예로 지금도 경내를 돌다보면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땅위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열어보면 1m 쯤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 과연 이곳이 못을 메워 이룬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경로로 해서 창건을 본 통도사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경내를 둘러보는 마음은 색바랜 고서의 책장을 넘기듯 흥미롭고 평안하다.

3.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조금 특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들 가람의 배치는 법당에 준하여 상․중․하 세 지역으로 나누며 이를 상로전(上爐殿,), 중로전(中爐殿,), 하로전(下爐殿,)으로 구분하고 있다. 상로전에는 역시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명부전, 나한전 등의 당우가 속해 있다. 중로전에는 자장율사의 영정을 모신 해장보각과 관음전, 용화전 등의 당우를 갖추고 있고, 하로전에는 일주문부터 시작되어 영산전까지의 만세루와 범종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외에 보광선원은 별개로 취급하여 또 하나의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기 전에 통도사 성보 박물관이 있어 눈길을 끈다. 아담한 뜰에 금강역사상이 놓여진 이곳의 성보(聖寶)들은 원래 절안의 관음전에 보관했던 것을 만세루의 독립건물에 진열장을 마련하여 전시해오다 다시 이같은 박물관을 건립, 소중히 보관,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석가여래의 친착가사를 비롯하여 국내 유일의 오계수호 신장도, 팔금강정(八金剛幀), 구룡병풍, 삼신정(三身幀), 달마도, 감로정(甘露幀) 등을 볼 수 있다.
 
성보를 전시한 박물관 외에 통도사의 35개의 대소 당우는 그 자체로서 건축, 회화, 조각 등의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용마루를 한자의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짠 대웅전도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물로 보물 144호로 지정되어 있고 용화전, 응진전, 대광명전, 관음전, 약사전, 극락적, 불이문, 천왕문, 영산전, 만세루들도 조선건축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용화전 앞 바리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봉발탑(奉鉢塔)은 보물 47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통도사와 유관한 역사유물은 통도사에서 약 4km 쯤 떨어진 하북면 백록리에도 있다. 보물 7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유물은 고려 의종 때인 1085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통도사의 영역을 나타낸 비로서 그 이름을 통도사 국장생 석표라 한다.
 
고려시대 사찰이 소유한 토지가 많았기도 했거니와 절땅을 신성히 여겼던 까닭으로 그 경계를 구분하여 사냥이나 벌목 따위를 금지시킨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이렇듯 통도사는 돌 하나 풀 한포기까지도 아득한 역사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4.  당우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니면서도 통도사의 정수인 금강계단에 대한 조급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강계단은 상로전 중에서도 제일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다다른 대웅전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았다.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창이 나 있고 그리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둔 금강계단의 모습이 보였다. 통도사 창건정신이 모두 이 곳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구룡지의 못을 메우고 그곳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중에서 여덟마리는 교화하여 승천시키고 한 마리를 남겨 금강계단을 수호케 한 곳.
 
금강계단은 그 모습에서만도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중생에게는 불법에 대한 귀의처가 되어 주었고 출가자에게는 호법과 지계에 대한 의지를 굳건히 다져주었을 금강계단은 1천여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천왕상으로부터 비호를 받고 있는 금강계단이지만 왜구의 불사리 약탈로부터 이를 지키려는 통도사 스님들의 끈질긴 투쟁 없이는 불가능한 보전이었다.
 
고려 우왕 3년(1377) 왜적이 내침하여 불사리를 가져가려함에 월송대사(月松大師)가 깊이 감추어 두었던 것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금강계단은 더 많은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영남지방이 왜구들의 약탈대상지였던 만큼 불사리 또한 약탈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백옥거사(白玉居士)가 왜진(倭陣)에 잡혀있다가 사리를 되찾아 탈출해 와서는 안전히 모실 곳을 위해 사명대사에게 맡기게 되었다. 다시 사명대사는 대소사리함(大小舍利函) 두개를 금강산에 계신 스승 휴정대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인연법을 잘알고 있는 휴정대사는 “어찌 영남만이 왜적의 침해를 받겠는가. 이곳 금강산도 동해에 있어 안전한 곳이 못되니라.
 
다만 영축산은 문수보살이 부촉한 곳으로 불행히 여법하지 못한 자가 있으나, 왜구의 마음을 읽어보니 그들이 얻으려는 것은 금주(金珠)요, 사리(舍利)가 아니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하였고, 사명은 스승의 영을 받들어 선조 36년(1603)에 이미 황폐된 계단의 옛터를 정리하여 다시 사리를 이곳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전국의 승니가 모두 이 계단을 통하여 득도하게 되며,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통도사. 승니오부가 학문을 더하게 하고 지계와 범계를 구분, 승려들의 과실을 경계하고 불상과 불경을 엄숙하게 하여 불법태동의 주축을 세운 자장율사의 뜻이 이 시대 불교인들의 마음에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금강계단에서의 발길은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영취산 흥국사

1.  영취산은 기사굴산(耆闍閑崛山)을 번역한 말이다. 인도의 영취산은 중인도 마갈타국 수도인 왕사성 부근에 있는 산이다. 마갈타국의 영취산에는 독수리들이 많이 서식했으며 영취산, 취두(鷲頭), 취봉(鷲峰), 취대(鷲臺)라고도 했다.
 
이 산에 취영들이 있다고 해서 영취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정의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영취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산이 많다. 부처님이 계시면서 법을 밝혀 많은 사람을 제도하는 그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부르는 산명이다.
 
여천 흥국사가 앉아 있는 산명도 역시 영취산이다. 지리산으로부터 달려온 한 지류는 진례산(進禮山)과 영취산을 여천에 놓아 흥국사가 앉을 수 있는 지형을 이루었다. 이곳의 지형은 한 송이의 연꽃과 같다. 진례산과 영취산을 중심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흥국사를 감싸고 꽃잎처럼 둘러 있다. 물길도 역시 자내리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와 정수암 계곡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마주치는 곳에 흥국사가 자리하고 있다. 풍수가 빼어난 곳이다. 물론 산명은 사람이 붙인 이름이다. 보조국사의 개산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곳을 영취산이라고 이름한 사람도 보조국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흥국사의 사적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절은 보조국사가 창건했으며, 창건 당시부터 호국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깊었다는 점이다.
 
사적기에 나타난 연대와 창건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96년,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할 수 있는 경관이 좋은 택지를 찾아 절을 짓기 위하여 성지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굴봉산에 올라 좌선정진하던 중 한 노승이 나타나 국사를 금성대(錦城臺)로 안내한 후 영취산을 바로보며 설명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연꽃과 같은 형국을 이룬 길지에 수림이 장려하고 지세가 맑아 용의 귀처럼 비상한 형국이므로 고승이 주석할 수 있는 대도량이 되리라고 했다.
 
절묘하고 빼어난 길지에 절을 지어 흥국사라고 하면 불법이 크게 일 것이며, 장차 흥국사가 부흥하면 나라와 민족이 부흥하고 나라와 민족이 부흥하면 절도 또한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국사는 성현의 가르침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고 흥국사의 터를 이곳에 잡았다.’ 고려의 사회적 정신과 무관하지 않는 호국의지를 간직한 흥국사는 창건시부터 그 정신적인 배경이 나라의 부강과 백성들의 안위에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2.  고찰에는 산수를 찾아서 마음을 닦으려고 했던 많은 선인들의 입김이 서려 있다. 산수하원자(山水河原者)들이 돌 하나를 옮겨다 뜰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정성을 쌓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녹아 있다.
 
 아무 것도 아닌 돌 하나 풀 한 포기가 산수의 뿌리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진인에 의해서 하나의 뜰에 옮겨지는 순간 그 돌과 풀은 새로운 생명력으로 응결하여 오염된 정신을 맑게 씻어주는 정교함으로 피어난다. 스승에게서 제자로, 또 그 밑의 제자로 이어지는 인맥에 따라 그 뜰은 더욱 정교한 미감으로 충일되어 이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뜰의 주인이 이루어 낸 숭고한 정신의 세계로 흘러들게 한다.
 
한번 뜰의 기반이 구축되면 누구나 함부로 그곳에 들어설수 없도록 하며, 설사 산란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 이르렀더라도 그의 오염된 정신을 세척하여 지고한 정신의 훈향을 느끼도록 한다. 자연의 이치와 생명의 이치를 내다본 이 뜰의 주인들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영롱한 음성으로 자연의 이치와 생명의 이치를 뜰이 지니고 있는 고결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준다.
 
설명이 필요없는 의취(意趣)로, 뜰에 놓인 돌 하나가 아무렇게 그 자리에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기나긴 역사를 말해줄 때도 있고, 인걸의 오고감을 말해줄 때도 있고, 고결한 진인의 성품을 들려주기도 한다. 만일 이러한 뜰의 한 옆에 이르러서도, 뜰이 주는 언어가 무슨 의미인지 받아서 간직할 수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어둡고 거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렇기 때문에 정갈한 마음을 갈망하는 산수자들은 언제나 마음이 허허로우면 누대(累代)를 이어오는 조사들의 뜰을 보기 위해서 숲이 무너져내리는 심산유곡으로 발길을 옮겨간다.
 
 크고 작은 산이 머리를 은성하게 맞모으고, 물길 하나와 다른 물길 하나가 손을 맞잡는, 조화와 합일의 영지에서, 자기 자신이 지금 어느 곳을 향해서 가고 있으며, 그 지향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깊고 깊은 묵상에 잠기고자 한다.
 
우리가 고찰을 찾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지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의 힘으로 점검해 보기 위해서이다. 그냥 장난삼아 고찰의 뜰 앞에 가서 서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찰의 뜰 앞에 서는 것은 유객이 한 점의 풍경화를 대하듯 그런 마음으로 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천년 고찰의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5백년 1천년 전의 노사들의 입김과 정교한 돌 하나를 손에 취어다 이 뜰에 보태기 위해 산하를 뒤지고 다녔을 그 맑고 맑은 정서에 깊이깊이 젖어보고자 함이다. 누대를 두고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그 정서에 거친 이 몸이 닿음으로 해서 정신의 오염이 씻겨 내리고 어두운 머리가 밝게 열려 날로 향상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관문을 두드려보고자 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찰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역사를 배우고, 역사로부터 오늘의 삶에 조명을 받고, 새로운 역사 앞에 어떻게 내가 서야 하는가를 배우고자 함에서이다.

3.  여천 흥국사는 보조국사의 창건으로 그 내력이 8백년을 두고 오늘에 이어지는 호남지역의 손꼽히는 대가람이다. 등지고 앉은 산의 형국이나 두줄기 물줄기가 합일을 이루는 모습이 불교의 기본적 사상인 원융의 세계를 그대로 표명하고 있다.
 
1182년, 그러니까 흥국사에 오기 14년 전인 25세 시에 진제사에서 행하던 담선법회에 참석, 승선에 응하여 승선이 되었던 보조는 선객의 길이 명예와 이익 추구에 있지 않음을 자각하고 표표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걷는 길을 택했다. 그 뒤 그가 적은 ‘정혜결사문’에 보조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이 모임이 끝난 뒤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대중생활 속에서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닦는 데 힘쓰며 예불하고 경 읽고 각각 맡은 바에 충실하며 본래의 성품을 닦아 평생을 활달하게 지내어 선각자의 높은 행을 따르면 어찌 통쾌하지 않으랴.”
 
이러한 보조의 정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흥국사이다.  1190년 봄, 흥국사에 그가 오기 6년 전, 보조는 거조사에 머물면서 옛날 함께 공부의 길을 걷기로 했던 도반을 모았다. 옛날의 도반들은 병들거나 죽거나 명리에 이미 몸을 적신지라 겨우 삼사인에 지나지 않았다. 거조사 시절의 10년 결사중에 지리산의 상무주암으로 옮겨 앉는 연간에 흥국사에 인연이 닿은 것으로 추정된다. 상무주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보조는 자호로써 목우자(牧牛子)라고 쓰기 시작했다.
 
흥국사는 그 창건배경에 불국토 사상과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는 맥락을 두르고 있다. 호국토(護國土), 호불법(護佛法), 호민족(護民族) 등의 깊은 뜻이 함축된 호국이라는 말에는 진실이나 성실이나 정직한 생활의지를 바탕으로 한 살기 좋은 땅의 건설에 깊은 의미가 있다. 정법을 지키고 정법을 꽃피움으로 해서 나라와 백성이 부강해지고 바로 살 수 있다는 의취가 더욱 깊다. 그저 막연하게 호국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국토가 밝고 청결한 인간의 정신과 깊은 연대를 갖고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인연국토설은 곧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보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노력하는 삶을 현전화시키기 위한 복선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과거의 어떤 현인이 이 땅에 있었던 곳이기에 더욱 그 있음을 뜻을 오늘에 밝게 현양해보자는 의미로도 해석해야 한다.
 
과거에도 정법이 꽃 피었던 곳이기 때문에 오늘에 있어서도 정법이 피어나게 하여 진실을 기반으로 한 사회가 이룩되어 안녕과 질서 평화가 넘치는 불국토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목우자의 의지가 흥국사에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을 더듬어볼 때, 흥국사는 불법이 크게 일어날 도량이라는 점을 들어 불국토설을 주장했으며, 이 절이 잘 되면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이 절도 잘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흥국(興國)이 비보(裨補)요 방국(邦國)의 지보(至寶)임을 강조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무신정권의 창궐로 문란해진 사회정의와 무질서에 대해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승가에 강한 반발을 보이면서, 승가와 사회가 지향해 가야 할 지표를 제시함과 동시에 국가가 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염원했는데, 흥국사는 바로 보조국사의 이와 같은 사상를 배경으로 창건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깊다.

4.  보조국사는 1196년에서 1201년까지 대략 5년여 기간 흥국사 창건에 주력하다 송광사로 옮기고 그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수선(修禪)도량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고군의 침입으로 병화를 당하여 한 때 폐사되게 된다. 그 후 250여년이 지나 법수(法修)스님에 의해서 다시 가람을 일으키는 인연을 만나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다시 전소되는 불행을 겪는다.
 
 30여년간 폐허 속에 있던 흥국사는 계특(戒特)스님에 의해서 다시 중수된다. 1624년부터 계특스님은 복원불사계획을 세우고 법당중건에 나섰다. 요사를 재건하고 전각을 세우고 범종과 불구도 갖추었다.
 
1639년에 홍교를 축조하고 6년 뒤에는 정문을 건립하여 사찰의 규모를 정비했다. 계특스님은 21년 동안 흥국사 복원에 총력을 쏟았으며, 그 뒤를 이어 그의 제자로 보여지는 통일(通日)스님이 1690년에 대웅전을 중창했다. 계특스님으로부터 무려 66년 동안이나 흥국사의 중창불사가 계속되었다.
 
흥국사는 1195년 보조국사에 의해 창건, 1560년 법수대사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1592년 임란으로 전소되었다. 1624년 계특스님이 법당을 세우고 선원과 요사를 재건했으며 범종을 주조하고 선당(禪堂)도 세웠다. 흥교도 축조했고 정문도 세웠다.
 
1759년에는 동상실(東上室), 선당(禪堂), 명월요(明月寮), 극락전(極樂殿), 보광전(普光殿)등 무려 31동의 전당이 있었으며 청계암, 연화대, 명적암, 금선암, 내원암, 안초암, 도솔암, 향운암, 영선암, 청운암 등 무려 10개의 암자가 산내에 있었다. 대중이 640여명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흥국사가 얼마나 규모가 컸던가는 짐작되는 일이다.
 
1779년경에까지 300여명의 승군이 흥국사에 주둔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서 국난에 대비한 당시의 흥국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1803년에도 승군 300여명이 적묵당 중창을 도왔고 1812년에 들어서도 300여명의 승군이 심검당 중건에 손을 썼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줄곧 승군이 흥국사를 외호하며 당우도 짓고 수행도 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정을 기하고자 전력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 경에는 30여명으로 대중의 수가 준 것을 보면 승군이 해체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재 박명선 주지스님은 퇴락한 당우의 보수와 전각의 개축에 힘을 쓴 결과 경내에는 대웅전, 팔상전, 나한전, 불조전, 무사전, 원통전 등의 전각과 적묵당, 심검당, 백연사, 만월요 등의 당우가 있으며, 누각은 봉황루, 범종각 등이 있고 일주문, 천왕문, 법왕문 등이 있다. 85년에 부임한 명선스님은 대웅전을 해체 복원했으며, 심검당도 해체 복원하여 면모를 일신했다. 또 정묵당, 봉황루, 종각, 범종 등도 원래 모습대로 모두 복원됐으며, 앞으로 노전과 응진전, 팔상전, 원통전을 보수할 계획으로 있다.
 
흥국사는 1630년에서 1780년까지 150여년간에 대중이 700여명이었으며 당우와 암자가 총림의 규모로서 가장 흥했던 점을 알 수 있다.우리가 오늘 이와 같은 흥국사를 찾는 것은 우리의 민족사에 한 걸음 다가서서 모든 것을 재조명해보고 앞으로 나아갈 진로를 밝게 모색하고자 함이다. 날이 어두워져 흥국사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흥국의 이념이 다시 그곳에서 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황악산 직지사
 
1.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지나쳐가는 제현상, 그 속에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장소와 물건 등 무념(無念)의 피사체들도 수많은 인연이란 집합체의 한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간의 겉으로는 의외성을 띤 만남으로 인해 흠칫 놀라기도 하고 한편 기뻐하기도 하며 부정할 수 없는 인연의 끈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지만 인연의 지중함이란 감각 이상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가령 무의식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상념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자신으로서는 단 한번의 경험도 없는 일들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면 이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상하게도 인간은 이러한 불가시적인 인연에 더욱 더 많은 매력을 느끼고 그 심연의 출처를 운명이라 규정짓기도 한다.
 
모든 일회적 만남이 씨앗이 되어 그로 인하여 인과 연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여 다시금 새 인연을 맺게 되는 철칙 속에서 뉘라서 함부로 대할 수 있으며, 뉘라서 삶을 무성의하게 살 수 있겠는가. 불가(佛家)에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지혜까지도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엇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불교 1천6백여년의 역사 속에는 그 시작이 있다. 이 시작 역시 인연의 끈으로 매듭짓지 않고서는 탄생할 수 없는 운명에서 태동되었다. 그러한 인연의 무거리를 더듬어 볼 직지사(直指寺)는 황악산(黃岳山) 아랫자락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장구한 세월을 지켜왔다.

2.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4개 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예부터 우리나라 5대 교역도시의 하나로 발전해온 김천시를 아래로 하고 북으로 15km 지점에 솟아 있는 황악산은 소백산맥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며 경북 금릉과 충북 영동을 구획하고 있다.
 
 일명 황학산(黃鶴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추풍령의 남쪽을 잇고 있기도 하다. 이 고장에서 저 고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고개가 필요했고 그래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추풍령, 사람들의 오고감이 많았으니 그 만큼 사연도 많고 애환도 많았으리라. 추풍령의 하늘은 기류가 어지러워 새들도 피해 간다고 한다. 구름까지도 쉬어간다. 이러한 추풍령의장애가 아니더라도 직지사를 찾는 길은 서둘러 갈 길이 아니다. 남들이 모두 꿍꿍거리며 여기저기 자신을 얽어 놓고 바삐 가는 세상이라도 홀로 넉넉함을 갖고 살아가고자 하는 여유를 찾아나선 길인데 굳이 바쁠 이유가 없다.
 
황악산 정상에는 엊그제 내린 눈이 희끗희끗 남아 있어 먼발치로 위엄있는 기품이 느껴졌다. 차츰  황악산으로 들어서는 느낌은 또 다르다. 외형의 굵직한 선이 흐물흐물 녹아들어 풍성한 산림과 계곡으로 살을 붙인 황악산은 마냥 아늑하기만 하다.
 
 직지사 입구의 너른 터에 이르러 왼쪽으로 오솔길이 굽돌아 나가고 그 입구에 ‘직지사 약수정’이 새겨진 입석이 우뚝 서서 행인을 지켜본다. 한국의 사찰 어느 곳에 이러한 감로수가 없겠는가. 민족의 영산이면 어느 곳이나 자리잡은 사찰을 볼 수 있음이고, 이곳 역시 황악산의 정수(淨水)와 직지사의 음덕이 합하여 맺어진 인연의 선과(善果)다.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에서 한 차례 돌풍이 바닥을 휩쓸고 비상했다. 건조한 바람 한 줄기가 땅을 휩쓸고서 내던지듯 떨쳐놓은 스산함, 그 속에는 어린 사명의 입산하는 뒷모습이 어려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생의 무상함을 느꼈을 사명이 조부의 손에 이끌려 낙동강을 따라 오랫동안 걸어온 피로를 풀 생각도 잊은 채 김천거리를 지나 직지사로 향하는 뒷모습이었다.
 
 풍족하지 못한 삶의 여건 속에서 등 떠밀리듯 의지처를 찾아 떠난 이 길이 민족의 오롯한 정신적 지도자로 커나갈 포석이라고 어린 사명은 상상이라도 했을까? 하지만 그의 의지만은 확고했을게다. 장부로 태어난 한 몫을 하기위한 포부만은 간직하고 있었을게다.
 
 황악산 맑은 계곡물 소리에 여독을 풀고 손과 얼굴을 씻은 그는 그 물에 세속의 인연까지도 씻어버렸고, 직지사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직지사의 조실 신묵(信黙) 스님은 공양을 마치고 쏟아지는 졸음으로 잠시 몸을 벽에 기댄 사이에 절 앞 은행나무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다.
 
너무도 상서로운 이몽에 은행나무 앞으로 나갔다가 조부의 손을 잡고 직지사로 들어오는 13세의 사명을 보았고, 이내 큰 재목감이란걸 감지한 신묵스님은 사명을 기꺼이 맞아 들였다. 그리하여 직지사는 창건 이래 가장 큰 스님으로 모시게 될 사명을 맞아들인 것이다.
 
밀양에서 태어난 그가 먼길을 걸어 이곳까지 찾아온 그 인연이 지중하고, 또한 초라한 행색의 그를 알아보았던 신묵스님의 혜안이 아닌들 직지사의 사적에는 기록될 수 없는 일이었다. 속가에서 이미맹자를 읽다가 출가할 뜻을 품었던 그였으므로 빠른 속도로 진보하여 18세에 선과에 급제했고, 30세에는 다시 직지사로 돌아와 주지직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인연은 그를 평탄한 수행자의 길만을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나라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호국불교를 표방해 내려왔고 이제 사명이 그 맥을 이을 차례였다.  불살생의 계율은 그만두고라도 모든 것이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아는 그가 아무리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었지만 손에 칼을 든다는 것은 자신의 수행에 뒷걸음을 쳐질 커다란 희생의 감수였고 댓가였다.
 
하지만 그의 공은 후인에게 귀감으로 남아 있고 불가에서뿐 아니라 이 나라 민족이면 누구에게라도 의식의 갈피 속에 그 공덕이 찬연히 빛을 바라고 있음이다.
 
그리하여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李粹光)은 스님의 공덕을 이렇게 표현하여 놓았던 것이다.
 
 盛世多名將(성세다명장)  성세란 명장도 많았지마는
  奇功獨老師(기공독노사)  기이한 공이사 오직 스님이...
  舟行魯連海(주행노연해)  魯仲連의 동해를 배타고 지나
  舌聘陸生辭(설빙육생사)  陸價의 말솜씰 다뤄 보렸다
  變詐夷無厭(변사이무위)  변덕은 왜놈들 타고난 버릇
  羈靡事恐包(기미사공포)  어설픈 외교는 위태하리라
  要間一長劒(요간일장검)  허리에 비껴찬 긴 칼을 보면
  今日愧男兒(금일괴남아)  오늘의 사나이 스스러워라.

3.  직지사의 역사는 한국 불교의 전래와 맞먹는 연륜을 갖고 있다.  418년(신라 눌지왕2년) 고구려의 중 묵호자가 지었다고도 하고 468년(눌지왕 52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지었다고도 전한다.후대의 역사가들이 묵호자와 아도화상을 동일 인물로 추정하고 있으니, 이 두 가지 설은 연대의 오기(誤記)로 인한 착오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삼국유사의 기록된 바에 의하면 묵호자는 위나라사람 아굴마(我崛摩)와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이 땅에 불교를 처음으로 소개한 데는 그의 어머니 고도녕의 힘이 많이 작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도의 나이 여섯 살이 되자 출가를 시켰고 16세에 위나라에 보내 불법을 익히도록 했으며 19세가 되어 고구려로 돌아온 아들 아도에게 “고구려는 아직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3천여달이 지나면 계림에서 성왕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며,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곳의 가람터가 있게 될 것이다.
 
그 곳이 모두 불전(佛前) 때의 가람터이니 너는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계림의 땅을 밟았지만 토속신앙과의 괴리로 인하여 핍박받게 되었고, 그리하여 잠시 모례라는 이의 집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추왕 3년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계림에는 공주의 병을 고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아도가 향을 피우고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 공주의 병을 낳게 해주었고 왕은 답례로서 그에게 소원을 물었다. 그는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 국가의 복을 비는 것을 바랄 뿐’이라 하였고, 왕은 이를 허락하여 절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이것이 신라 불교전래의 시작이다. 아도화상은 우선 지금의 선산군에 도리사(桃李寺)를 세웠다. 그리고 멀리 황악산 쪽을 바라보다 손으로 지금의 직지사 터를 가리켰다. 좋은 절터가 있음을 손가락으로 암시하였던 것이다. 사명을 직지사라 하였던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 (直能人心見性成佛)’는 불교의 가르침에 근원하였다.
 
창건 이래 선덕여왕 14년 자장율사가 중창하고, 경순왕 4년 천묵대사의 중수가 있은 후, 고려 태조 19년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대대적 불사를 이루어 43동(棟)의 당우(堂宇)와 산내에 약 26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직지사는 명실상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4.  직지사의 경내는 단아한 모습의 당우보다도 여백이 더 아름답다. 무위(無爲)로써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이의 멋이 배어 있고 조화로움이 무엇인줄 아는 이의 넉넉함이 체격을 갖추고 있다. 또한 당우 사이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해놓은 정원시설은 자칫 단조로와 보이는 직지사경내의 백미(白眉) 역할을 하고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 만세루 등의 건축이 조선시대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웅전 앞 3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물 제6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은 본래 문경군 소재 도천사(道川寺)에 있던 것인데 직지사에 탑이 없어 1974년에 이전한 것이라 한다. 이외에도 대웅전 삼존불과 후불탱화 역시 보물 67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긴 세월 발전과 퇴락을 거듭해 나온 직지사가 근세에 다시금 발전이 기틀을 다져 나가고 있는 힘은 이 곳에 주석했던 많은 스님들의 공덕에 의해서이다. 6․25시절 영천(靈泉)이란 스님 한 분이 직지사에 머물고 있었다. 때는 전쟁과 피난으로 인해 고아가 많이 생겨났던 시절이다. 스님은 직지사 주위로 피난 온 아이들을 모아다가 넉넉치못한 절 살림 속에서 이들을 거두어 보살폈던 것이다.
 
이러한 공덕은 사명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생겨날 인연의 씨앗을 뿌린 것이기도 하고 말없는 보살도의 실천이기도 했다.  현재의 직지사는 전 총무원장 오록원스님을 모시고 그 면모를 일신해 나가고 있는데 특히 중앙연수원의 설립과 같은 불사를 진행, 불교대중화로의 큰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직지사는 천여년 세월의 연륜답지 않게 새롭고 힘차다. 겨울이 아니고서는 따뜻한 태양의 고마움을 느낄 수 없듯이 직지사의 오늘을 느끼기 위해서는 직접 가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