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의 사찰(기림사,부석사,고운사,월정사,해인사,금산사)
작성자 마이템플 등록일 08-03-16 13:55 조회수 1,018
 
 
함월산 기림사
 
우리 한국의 사찰은 도량마다 한결같이 널찍한 가슴으로 ant 중생을 포근히 감싸안아 이 성지를 밟는 모든 사람을 편안함과 따스함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이 땅에서 뿌리를 묻고 살아온 일체중생이라면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곧 한국 사찰의 매력이요, 1천6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말없이 중생구제와 호국의 일념으로 견지해 오고 있음에 불교를 입에 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에서 들어온 각종 이교(異敎)에 물든 사람에게까지도 불교이 신성함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존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북 경주군에 소재한 기림사를 찾는다면 더욱 뜻깊은 참배가 되리라 생각한다.
경주군 양북면 호암리, 속칭 범바위골 깊숙한 함월산 동족에 지장대찰 기림사는 이 나라 민족과 함께 자리하여 1천3백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풍진을 마다하지 않고 사부대중을 제접하고 있는데 이 기림사(祇林寺)라는 사명(寺名)이 내려지기 이전에 연대를 측정하기 어려운 까마득한 옛날옛적에 천축의 사문, 광유화상이 부처님의 도량(道場)을 마련하여 임정사로 명명, 5백제자를 교화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우리나라 설화문학의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사찰하기도 하다.
 
그후 선덕영왕 12년(서기6백43년)에 원효대사가 도량을 확장하고 종전의 임정사에서 지금의 기림사로 사명을 개칭했다는데 삼국유사에도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화룡의 선왕인 문무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란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부근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최소한 통일신라 초기인 신문왕 이전부터 있어왔던 고찰임을 알게 한다.
 
또한 사적기에 살펴보면 ‘조선왕조때 경주부윤 김광묵이 사재를 털어 중수했으며 철종14년(1863년)에 큰 불이 나 1백13칸의 건물이 소실됐다’는 기록이 현존하는 이 대찰은 경주시에서 동쪽의 감포 쪽으로 50일쯤 동진하다가 양북면 소재지인 어일 조금 못미쳐 안동이라는 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에서 불쪽으로 매끄럽게 포장된 도로를 다라 6km쯤 북진하면 참배객을 맞는 첫 번째 관문은 널찍한 마당에 궁궐의 담장 모양과 함께 철문 옆쪽의 매표소를 만나게 된다. 이 곳을 지나 5백여m를 오르며 대․소 16동에 달하는 대찰, 기림사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찰 거의가 산중에 자리하여 그 가람의 법당이나 요사채는 한결같이 층계를 이루는데 비하여 이 기림사는 정전(正殿)인 대적광전이 제일 낮은 곳에 자리하여 대조를 이루는데 보편적으로 산자락에 위치한지라 북에는 함월천이 흐르고 남에는 도로와 개활지가 있으며 서와 동이 함월산 준령으로 숲을 이루는, 마치 농지(農地)의 일부처럼 비녕을 이루지 않음이 여느 고찰과 틀리는 점인데 2~3개 동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철종14년 화재 후 고종15년(1878년)에 경주부윤 송정화에 의해 중창된 건물들이며 법당과 요사채가 각각 별개의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본전인 대적광전은 정면 5간에 측면2간의 맞배지붕으로 형성된데 뒤이어 응진전, 약사전, 진남루, 석탑 등이 옹기종기 이웃을 이루고 한단 더 높은 곳에 종각과 관음전, 삼성각, 지장전과 요사채 그리고 현재 신축중인 삼천불전, 박물관 건물2동이 조화를 이루며 조선시대에는 31본산 중 11교구 본사로서 경북 동남지구의 사암을 장리하던 위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웅장한 함월산의 산세는 영구음수(靈龜飮水)의 형국으로 최대길지라 전하며 현존 가람배치 역시 사적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정좌하였고, 국가 보물 제833호로 지정된 대적광전은 다포식 건물로 외관은 본전건물다운 웅건함을 갖추었으며 넓고 화려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본전에 모셔진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은 보물 제958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우에 각각 노사나불과 석가불이 협시를 이루고 있으며 국보에 가까운 복장물까지 최근에 나온 바 있는 비로자나불상은 외무 당당하고 몸체 풍만하여 조성 당시의 불교의 위세를 감히 짐작케 하면서, 고려말과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적 특징을 정감있게 표출하고 있다.
 
또한 장대한 상체에 비하여 결가부좌한 하체의 폭은 넓으나 높이가 낮은 편이며 통견한 법의는 두텁고 옷자락의 주름은 날카롭고 정교하게 세웠다. 상의는 배 부위에서 따라 묶어 상단의 깃을 주름잡히게 나타내었는데 이와같은 옷주름 처리법은 15세기 불상에서 이미 보여왔던 것으로 본전의 삼존불상은 전반적인 양식상의 특징에서 15세기 후반이나 16세기 전반기의 불상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대적광전 바로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경북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 통일신라의 일반형 석탑양식을 따른 비교적 완전한 석탑인데 현재 삼층기단은 갑석 모두가 남아있고 상대 중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탱주 한 개씩을 모각하고 있으며 그 위에 놓여있는 상대갑석의 일면에는 부연이 있고 또한 갑석 상면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있으며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앙화가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통일신라말기의 석탑이다.
 
오는 6월 중에 준공을 보게 될 박물관에 모시고자 소중히 봉안중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은 매우 희소하게 남아있는 국보급 보물로 조각 수법이 특이하고 조성연대 또한 명확한데 타래머리를 한 위에 보관을 따로 만들어 얹었고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둥글고 풍만한 안광과 편안한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즉시 알게 한다. 복부의 큼직한 띠매듭과 가슴에 걸려있는 세가닥의 영락띠는 조선시대 목불의 특징을 보여주어 예술적 가치로 절찬을 받고 있는데 조성연대는 하대 상면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해 연산군 7년으로 판명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종이로 제조하여 개금을 한 불상이라는 데서 현재 보물 제 415호로 지정, 보호를 하고 있다.
 
이밖에도 도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된 응진전을 비롯, 곳곳의 건물터와 임진왜란시 이 조국을 왜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승군을 모아 그 지휘본부로 사용했던 진남루가 자리하여 한 때는 본산으로서 많은 말사를 거느린 대찰답게 역사 및 예술성을 함께 하여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본전으로부터 3백m 남쪽에 위치한 산내 암자인 남암은 울창한 숲에 싸여있어 수도정진의 최적지로 불경소리 낭랑하고 본전뒤로 5백m에 자리한 북암에는 지난해에 5명의 수행납자가 7년 묵언수행을 회향하였고 현재 4명의 사문이 3년 묵언 결사에 들어가 벌써 1년 2개월을 경과한 가운데 상구보리하고 하화 중생하는 승가 본연의 수행을 견지하여 산내 암자에서는 최고의 수행으로 용맹정진하고 있으며 본전인 기림사에서는 포교와 가람 확장불사로 불교의 위상정립에 영일(寧日)없는 부처님의 시봉을 체득하여 성불의 대과를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 기림사에서 뺄 수 없는 것은 불교와 물, 수행과 음다(飮茶)의 상관관계로 보아 오체를 맑게 하는 오종수가 그것인데 경내외에 감로수, 화정수, 장군수, 안명수, 오탁수가 자리하므로 차의 맛이 으뜸이고, 마음이 편안하며, 기골이 장대해지고, 눈이 밝아지며, 물이 좋아 까마귀까지 쪼았다는 다섯 종류의 우물과 우물터가 있어 광유화상이 사명을 임정사라 하여 좋은 물을 상징, 대찰을 이룩한 흔적 또한 역력하다.
 
신라 당시의 명산인 토함산과 함월산의 두 산은 토함산이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먹었다, 토했다 하는 형국의 명산으로 호국의 대찰 불국사와 석굴암을 이 산 기슭에 건립, 충․효․예로써 국가와 부모와 개인을 위한 수행에 정진하였다면 달을 먹었다, 토했다 한다는 함월산의 기슭에 기림사를 세워 정중동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을 꾀했다는 점은 불교의 상대성원리와 유교의 음양을 뜻하는 내용으로 지리나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불국사와 기림사의 불가분의 관계는 너무도 밀접하여 그 뜻하는 바 조상의 슬기에 오로지 감응할 뿐”이라고 경탄한다.
 
  또한 사찰에서 동쪽으로 1.8km 지점에 위치한 동해의 바닷물속에 문무대왕의 수중릉에 있는데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을 위하여 지었다는 사적 제31호의 감은사지 금당 밑에는 지금도 문무왕이 왜구로부터 국토를 지키기 위해 대룡(大龍)이 되어 땅밑 수중 굴 속으로 감은사를 왕래한다는 전설이 맥맥히 흐르고 있는 가운데 국보 제112호로 지정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2기가 호국불교의 역사와 풍요로웠던 불교분화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화룡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얻었다는 이견대가 있어 호국의 성지로 불교수행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8․15 해방과 함께 교통과 통신 및 인접이 드물다 하여 조계종의 11교구 본사를 지금의 경주 불국사로 옮김에 지금은 비록 불국사의 말사로서 20여명의 납자가 수행하고 있지만 그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이미 응진전이 복원되었으며 기림사 복원 전적(典籍) 총 54권 71책과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비로자나불 복장 전적, 건칠보살상, 복비, 탱화, 조선초기의 경판 수십장, 와당, 각종 서책등 5백여점을 구분하여 이 나라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주기 위한 작업으로 지난해에 주지로 취임한 장법일스님이 사계(斯界)의 고증에 입각, 35평씩의 박물관 2동을 지어 오는 6월에 개관, 여법한 불교사적 박물관으로 전국의 사부대중을 맞이하게 된다.
이와 아울러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진 관음전 우측에 호구호법의 기원을 응집시키기 위해 청자로 빚은 도자 부처님 3천불을 봉안코자 건평 1백8평의 호국삼천불전을 세워 현재 80%의 공정을 보이고 있으며 전국의 선남선녀로 하여금 원불을 접수받아 3천불 중 2천6백여 부처님이 접수, 조성되어 중생들이 부처님을 조성하면 선7대와 후7대, 그리고 자신까지 합쳐 15대가 성불을 이룬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여설수행(如說修行)하고 있다.
 
이러한 사역을 지닌 한국의 사찰에서는 목어(木魚)를 울려 수중의 중생을 구제하고, 우판 소리를 내어 공중의 중생을 화도하며, 법고를 쳐 지상의 중생을 제접하고, 범종을 삼세시방에 발성하여 일체의 지옥 중생을 거듭나게 한다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서구의 무분별한 배금사상은 부처님의 사자후로 일소해 버릴 수 있으리라 확신을 해 본다.
종무소의 사무원, 후원의 공양주, 소임을 맡은 스님, 경내를 분주히 오가며 청정도량을 이루고자 신수분렬의 고행으로 사역병이 되다시피 한 주지 장법일 스님 등 사중의 식솔들이 이체동심이 되어 일사분란하게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서 지금도 훌륭한 한국의 대찰이지만 앞으로 더욱 면모를 일신한 도량이 될 것이라는 의지를 엿보게 한다.
 
사찰의 창건당시부터 끊어지지 않고 울렸다는 지장기도 소리를 뒤로 하며 현세안온과 후생선처의 부처님의 자비를 마음껏 머금고 매표소를 나서며 면모가 일신된 기림사의 전경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봉황산 부석사

1.  한국 불교의 위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끈질긴 민족의 존속과 궤를 같이 하여 오랜 역사를 지내온 한국불교는 신심있는 신도 수를 헤아리기 이전에 그 탁월한 사상성과 진정으로 삶을 사고할 수 있는 철학적 매력으로 인해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뻗어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전래의 초창기를 더듬어 보면 원효와 의상이 우뚝 솟아 있음을 볼 수 있고 그 중 의상은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인물로 조명되고 있다.학문적 한국불교 위상의 선두에 나서 지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낸 의상. 의상의 화엄선풍이 빚어낸 영주(榮州)의 부석사(浮石寺)는 태백산의 준령중 봉황산(鳳凰山) 자락에 일찍이 1천3백여년 전에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북 영주는 5백리 낙동강의 남상이고 삼국시대의 국경을 이룬 곳이었다. 이제 그런 흔적을 찾을 순 없지만 부석사는 남아 있다.
 
의상이 화엄사상과 부석사 창건에 얽힌 선묘(善妙)와의 설화가 고색의 품위를 잃지 않고 세인을 맞아 들인다. 마을 어귀의 진달래며 개나리가 봄기운에 푹 젖어들게 한것과 달리 이곳 부석사에는 아직 완연한 봄빛이 아니다. 다만 파릇하게 올라선 잔디가 봄의 서막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2.  인간의 삶은 기껏해야 백 년을 넘지 못한다. 게다가 나름대로의 삶의 의지를 갖고 자신만의 생을 꾸려나가는 기간은 얼마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삼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허무가 시작되고, 그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예술, 문화, 철학 등 제분야에서 흔적을 남겨놓게 된다.
 
불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찰이라는 것이 처음 인도에서 하안거의 우기 중 탁발이 어렵고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자 일정기간만 대중이 모여 생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인데, 우리에게 있어 사찰은 탁발이 허용되지 않는 지금, 승려생활에 꼭 필요한 조건이 되고 불교의 문화 예술 사상 등을 발전시키고 흔적을 남겨놓은 역할의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봉황산 중턱의 부석사 또한 그러한 의지로 창건되었다.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전파하기 위한 의지처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2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세워진 부석사는 창건에 얽힌 설화가 애틋한 사연을 담고 전해져 내려온다. 송고승전 의상전에 전해오는 이 설화를 소개하면, 의상의 나이 스무살 때, 당나라에서는 화엄교학이 한창이라는 소문을 듣고 원효와 함께 도당 유학의 길에 오른다.
 
여기서 연상의 원효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당으로의 유학길에 포기하고 신라로 되돌아 가지만, 의상은 끝내 죽음을 무릅쓰고 유학의 길을 떠난다.  이 일로 해서 세상은 원효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전후사정을 곰곰 되짚어 보고 인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면 이 또한 편견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의상이 상선을 타고 등주해안에 도달, 한 신도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의상의 용모 또한 청하하고 기품 있음을 본 그녀는 의상을 가까이하려 애써보지만 움직일 수 없음을 느끼고 그 앞에서 다음과 같은 대원을 발했다.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하겠습니다. 대승을 배워 익히고, 대사를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로 하는 생활품을 바치겠나이다.”
 
그 후 의상은 지엄삼장에게로 가서 화엄학을 배웠다. 공부를 마치고 전법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그는 다시 그 신도의 집에 들러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때 의상대사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아가씨는 의상을 위해 법복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집기들을 함에 가득 넣어 의상을 찾았으나 그가 탄 배는 이미 선창을 떠났고, 그녀는 해안에서 아련히 멀어져가는 배만을 지켜봐야 했다.
 
배를 바라보던 그녀는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원을 하며 ‘나의 참된 본심은 법사를 공양하는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저배에 닿기를...’하며 옷함을 물위에 던졌다. 그러자 옷함이 의상이 탄 배에 도달했고, 그녀는 또 다시 맹세하여 자신의 몸을 용으로 변해 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신라땅에 이르도록 해주었다.
 
귀국을 한 의상은 산천을 두루 편력하며 화엄학을 펼쳐 보일 땅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의상이 도착한 곳은 지금의 부석사가 세워진 자리다.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법륜을 굴릴 만한 곳이라고 여긴 의상은 왕의 명에 따라 절을 세우려 하지만, 다른 잘못된 주장을 하는 종파의 무리들이 5백이나 모여 있는 것을 알고는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이 때 늘 의상 곁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온 선묘는 의상의 이러한 생각을 감지하고 곧 용의 모습을 바꿔 허공 중에서 바위로 변했다. 넓이가 1리나 되는 바위가 되어 떨어질 듯 말 듯 주면을 맴돌자 소승에 집착한 군승들은 그 돌을 보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의상이 원하던 길지에 부석사의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선묘의 의상에 대한 지극한 발원과 의상의 구도자적인 마음은 부석사 창건의 신비함과 함께 참배객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이 설화와 함께 부석사에는 선묘정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는데, 신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물 때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면 감응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의상을 도와 천리 이역의 땅에 오게 된 선묘의 넋이 1천3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석사를 지키며 살고 있다고 하니 이 절의 무량수전 밑에 묻혀있는 석룡이 그것이다.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부터 머리부분이 시작하여 앞뜰 석등 아래에 그 꼬리부분이 묻혀 있다고 하는 이 석룡은 일인들에 의해 부석사가 크게 개수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3.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대석단과 높게 솟은 안양루 무량수전의 위용을 보고 위압감만을 느꼈습니다...” 부석사에서 공부한 지 3년이 돼 간다는 스님 한 분이 경내를 소개하며 한 말이다. 천왕문을 지나 눈앞에 다가선 대석단은 스님의 말대로 금세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놓을 만큼 묵직한 무게에다 천 년의 세월의 영고성쇠를 안고 의연했다.
 
여느 계단보다 조금 높게 쌓여진 층계를 힘겹게 오르면 날렵히 오른 안양루와 대소 당우가 눈에 들어오는데 푸른색과 붉은색의 조화로운 단청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고색창연 그대로다. 언뜻 보기에 초라하게 느껴지는 당우의 빛깔들이 차츰 안개에 익숙해지면서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는 전통과 고전미로 대변되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된다. 부석사는 대소 당우와 탑 누각 심지어 나무에 이르기까지 국보와 보물이라는 또 다른 이름들을 하나씩 앞세워 놓았다.  그 중 부석사의 본당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서 동양최고(東洋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물이다. 무량수전 앞에서 내려다 본 봉황산과 부석사의 탁트인 전경은 참으로 뛰어나다.
 
 안양루에 걸려있는 무량수전급제각중수기(無量壽殿及諸閣重修記)의 한 구절은 만인의 정감을 대변하고 있다.  “... 몸은 바람 난간을 의지했으나 무한강산은 다투어 발 아래에서 달리고, 눈은 하늘 가 넓고 넓은 건곤(乾坤)을 따라 저 복중(腹中)에 다 거두어 들임이니 가람의 승경(勝景)은 이와 같은 곳이 없더라.”
 
고려 목조예술의 정화 무량수전은 문무왕 16년 의상에 의해 창건된 이래 약6백여년만에 적병에 의해 소실되었고, 홍무 9년 원응국사에 의해 법당이 개조되고 불상을 개금했다 한다.
 
공민왕이 썼다고 하는 무량수전의 편액이 중앙에 걸려 있고, 내부의 아미타여래좌상이 서쪽에 위치 동면(東面)하고 있는 특수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 또한 그 조각수법이나 양식에서의 우수성이 현존하는 국내 최대최고(最大最古)의 소조불상으로 국보 제45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이외에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국보와 보물 속에 선묘의 넋이 화한 부석은 아무런 명패 없이도 그 뜻이 고고하다. 무량수전 뒤편의 이 부석은 한 덩이의 큰 자연 반석으로 돌무리 위에 비스듬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참배객의 염원이 쌓여진 돌탑이 놓여져 선묘의 영혼이 외롭지만은 않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보면 ‘언뜻 보기에 돌무리 위에 얹혀진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듯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의 틈이 있어 노끈을 넣어보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뜬 돌인줄을 알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이 반석이 떠있다고 생각할 수는 엇지만 선묘가 사도(邪道)에 집착한 무리들을 쫓아내기 위하여 돌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다녔다는 창건설화를 상기할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은 화엄의 세계를 설하고 그 설한 바에 따라 부지런히 행함을 귀중히 여겨 강의하는 일 외에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위시하여 몇 권의 저술을 남겼다. 물론 많은 분량의 저술 활동을 펴진 않았지만 그이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사상은 불교를 학문적으로 발전시켜, 깨우침만이 불교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일단의 무리에게 경각심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화엄일승법계도’의 말미에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적어 놓았지만 후인에 의해 이 책의 저자가 의상임이 밝혀졌다. 태백산 부석사로부터 발단한 의상의 화엄종은 그의 제자 십상수삼천문도(十上首三千門徒)라고 할 만큼 크게 번성했다. 그런데 지금의 부석사는 아니 지금의 불교는 그만한 선각자의 부재로 인함인가 그 염원이 날로 적막하게만 느껴진다.
 
무량수전 뒤편 오솔길을 걸어 오르면 조사당이 나오고 그곳에는 의상ㅇ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의상이 꽂아 놓은 지팡이가 자라서 되었다는 비선화수(飛仙花樹)가 철망 속에 갇혀 잎새 몇을 가지밖으로 내밀어 놓았다. 다시 한번 의상과 같은 선각자의 도래를 기다리며...
 

 
가야산 해인사

1.  깎은 듯 아아(峨峨)할 뿐 도도(陶陶)함이 없는 너 가야(伽倻)의 이마.
  푸른 천년의 낙락(落落)이 문이 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무상(無常)의 동(洞)길이 홍류(虹流)의 물소리로 종종(淙淙)하다.
  고목의 허벽(虛壁)을 치는 딱따구리의 색공 두 글자에
  집념한 직승(職僧)의 목탁소리가 화(和)한다지만
  준령의 정상을 넘어 오는 송뢰(松籟)와 한석(寒夕)을
  높이 외마디하는 까마귀의 소호(嘯呼)를 어찌 겨루랴.
  고운(孤雲)이 한 번 들고 나온 자취없다함은
  인적출입의 욕됨을 잠깐 염취(廉恥)하였음인지.
  팔만장격각 용마루에 하늘 빛 청(靑)기와가 녹슨다고 할지라도
  번뇌무진 속에 생사불수(生死不隨)의 법호는 빛나리라.
 
이상은 효공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시인 파성이 ‘가야산 해인사’에서 읊은 감히다. 파성의 문재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한 없이 신비로운 가야산 중턱에 법보종찰 해인사는 자리하고 있다. 높이로 따져보면 명산이 되지 못하였을 지도 모를 가야산이 갖는 무게는 자연히 홀로 빼어나지 않고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구축한 가야산만의 분위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있을 해인삼매. 파릇한 연기가 주위의 어둠을 쓸어내는 가야산 해인사의 뜰에서 맞는 여명이 가져다 주는 삼매는 기어이 출가한 결행의 의지가 응축된 삼매이다. 그것은 무한한 환희이고, 중생에 대한 자비이며 또 다른 깨달음의 시작일 수 있다. “전생에 쌓은 복덕이 얼만큼 되어야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나요”하며 한 스님에게 합장하는 객승의 인사말이 일주문 앞에서의 발목을 붙잡는다. 또렷이 들려온 그 스님의 말이 잠시라도 출가자의 마음으로 해인사를 찾은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깊은 의미를 던져준다.
 
속세의 들뜬 공기가 이 만큼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것은 가야산의 정기 탓도 있겠지만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이 이미 자연과 같은 속도로 호흡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가야산이 갖는 힘일 것이다.

2.  소백산맥이 덕유산을 앞두고 동쪽으로 뻗어 경상북도와 남도의 경계를 구획하면서 일대지맥을 형성한 곳이 가야산맥이다. 시인묵객들의 제영으로 나름의 정취를 즐기고 남겨진 무릉교, 홍필암, 음풍뢰, 취적화, 제월담, 홍류동 등의 명소가 해인사 들목의 절경을 대변하고 있고 그 중 홍류동의 절승은 최치원의 전설과 어우러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홍류동의 입구 오른편 석벽에 최치원이 남겨논 싯구는 별천지 가야산을 얘기할 때면 으례히 떠오르는 표상처럼 남아 있다. 또한 가야산은 예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해인사 안에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를 마련하고 정견모주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산신이 머문다는 가야산은 그 골이 깊고 궁벽하여 예부터 전란(戰亂)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일컬어졌다. 고려때 판각된 대장경이 이 곳에 봉안된 것과 고려 고종이 1227년 ‘명종실록’을 해인사에 보관한 것도 다 그러한 까닭에 연유한다.
 
범어로 ‘소’라는 뜻을 가진 가야산의 불연과 맺어진 해인사의 창건을 알려주는 문헌은 「가야산해인사고적」 및 「해인사중창기」가 전해지는 가운데, 최치원의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에서 그 시작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신림의 제자 순응이 서기 766년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신라로 돌아와 애장왕 3년(802) 가야산에 해인사의 창건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목태후가 불사를 도와 진행해나가다 순응이 갑자기 돌아가게 되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마침내 완성을 보았다고 전한다.
 
한편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 창건에 설화의 요소를 첨가해 놓았다. 양나라 보지공(寶誌公)이 임종시에 제자들에게 「답산기」를 주면서 고려에서 온 두 스님에게 전해줄 것을 유언했으니 그들이 순응과 이정이며, 다시 공의 유언에 따라 두 스님은 신라로 돌아와 선정에 들어 아무런 잡념이 일지 않는 길지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 때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이 나서 어떤 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선정에 든 두 스님이 오색실을 주며 궁전 앞 뜰에 심어져 있는 배나무에 한 쪽 끝을 매고, 다른 한 끝은 등창난 곳에 대도록 시켰다.
 
과연 스님이 시킨대로 하자 왕후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대신 배나무가 말라 죽는 이적을 보였으니, 애장왕은 두 스님이 있던 절에 와서 전답 2천5백결을 바쳤다한다. 이러한 유래 속에서 해인사 창건의 의의는 해인이라는 절의 명칭에 응축되어 있다.
 
해인이란 대방광불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라는 삼매의 경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는 의지에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인 것이다. 우리나라 화엄학은 신라시대 당나라 지엄의 문화에서 화엄을 공부하고 귀국한 의상이 문무왕 16년에 부석사를 세우고 황엄종지를 떠나가면서 시작됐다.
 
그의 문화에 십대덕(十大德)을 비롯한 많은 화엄종장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부석사, 화엄사, 범어사, 해인사 등의 화엄십찰을 창건했다. 해인사의 창건주 순응 역시 의상의 법손이다. 그리하여 해인의 창사정신이 와엄의 사상에 있음은 당연하다.

3.  화엄종찰의 해인사는 실제 법보종찰로 더 알려져 있다. 이것은 고려대장경의 보관으로 인해서다. 불서의 총집성을 중국에서는 대장경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책들은 서사로 전래되어 오다가 우리에게는 최초로 1011년에 고려의 현종이 대장경판을 새겨 부인사(符仁寺)에 두었고, 그때부터 대장경판의 조조(雕造)는 호국의 중요한 불사로 간주되어 각국에서, 그리고 중국의 몇몇 사찰에서는 앞을 다투어 조성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해인사에 소장된 대장경은 제1차 조조의 대장경이 아니다. 초기 부인사에 소장하였던 대장경판이 몽고병에 의해서 소실되었고, 제2차 조조 고려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 소장본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문종의 넷째아들 의천이 흥왕사에서 속장경의 조조를 실시하여 현본 대장경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점이다. 경판의 재료는 제주도, 완도, 울릉도, 거제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는 백화라는 이름의 나무를 벌채해 와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두었다가 꺼낸다.
 
 다시 그것을 같은 크기로 조각을 낸 다음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 말리고 그런 후에야 대패질을 해서 그 위에 경문(經文)을 붓으로 한자한자 써나가면, 그에 따라 글자를 새겨 나가게 된다. 마무리를 위해 경판의 두 끝에는 각목으로 마구리에 붙여 뒤틀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전체 판 위에다 가볍게 옻칠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네귀에는 동렬장식을 달아 놓는 것으로 모든 작업을 마감한다. 이러한 정성스런 과정은 고종 23년에 대장도감이 설치되어 고종 38년의 16년이란 세월을 걸쳐 완성해내는 역량을 보여 주었다.
 
대장경 주조는 물론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물리치게 해달라는 민족의 단일된 염원이 서려있음에서 더 큰 의의를 찾기도 한다. 거기에다 오자 하나 발견할 수 없이 정치한 솜씨로 제작된 대장경은 그래서 우리만의 자랑이 아닌 세계의 보물로 남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장경이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지게 된 것은 속장경을 조조한 의천이 한 때 해인사에서 장주할 생각을 했던 인연 깊은 곳이었다는 점과 여말선초(麗末鮮初) 극심한 왜구의 노략질 앞에 가야산의 그윽하고 신령스런 산세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법보사찰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것을 보관한 대장경 판전에 담긴 조상의 슬기가 또한 돋보인다.  대적광전 뒤편에 우뚝 솟은 장경각의 보안당에는 상하 60간의 대장경을 말끔히 정돈해 놓은 건물이 그것으로 이 건물의 양식은 원주의 중각부분을 가장 굵게 한 기둥의 수법이 고려 건물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해인사의 수 차례에 걸친 화재에도 이 건물만은 재난을 면하였고 개방된 창문으로 날짐승이 침범하지 못하는 신령스러움 속에 양편에 뚫린 창문의 크기와 배열, 진열장치, 통풍, 방습 그리고 인경(印經)의 작업을 할 때 통행의 편의 등을 감안한 조상의 슬기는 생각할수록 감탄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정성과 합일된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민족의 역량이란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며, 불법이란 귀의처 없이는 상상조차 힘든 일인 것이다.

4.  화엄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창건한 해인사가 여말 팔만대장경의 봉안으로 인하여 법보사찰로서의 면모를 과시해 온 것이 너무도 큰 표상으로 자리해 여타 해인사만의 것을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 되었다.  하지만 출가사문이 되어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서원한 이는 한번쯤 해인사와 인연 맺기를 간절히 기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서원은 당연스레 해인사에 있어 고승은 물론 대덕까지도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로는 화엄사찰답게 의상을 위시하여 신림대덕, 희랑대사 등 신라시대 화엄의 대가들과 한국불교사를 통해 뚜렷한 족적을 남겨 둔 사명대사, 부휴선사, 고한희언, 벽암각성의 대덕들과도 인연을 맺어 놓았다.
 
또한 유명무명의 무수한 스님들 속에 섞여 선경(仙境)의 미소를 흘린 이들이 있으니, 학사대의 주역 최치원을 필두로 하여 대장경 조성의 전설적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 그리고 추사 김정희선생과 정인홍등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해인사의 서편 홍제암을 비롯 조계종의 종정 성철스님이 계시는 백련암에 이르기까지 가야산에 산재한 부속암자를 찾는 길은 해인사를 거쳐간 스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기회를 준다. 큰 절에서 제일 가까운 홍제암으로 가는 길에는 사명스님의 비석이 비록 상처입은 모습이지만 스님이 입적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고, 조금 높게는 지족암이 있어 포랑스님의 손길을 느깔 수 있다.
 
지족암에는 현재 일타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데 근대 어려웠던 해인사의 안팎 살림을 보살피는데 큰 힘을 기울이셨던 분이다. 스님은 늘 자신이 다닌다는 산책로를 걸으시며 해인사의 또 다른 정취와 역사를 들려주시고는 자기 본바탕의 천진한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정진임을 일러 주신다.
 
해인사를 한번 다녀와서 모든 것을 느끼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만큼 가야산의 정취가 그윽하고 해인사에 담긴 뜻이 또한 깊은 것이다.
 

 
등운산 고운사

1.  연만 중․북부의 중추사찰로써 선교양종 삼십일본산의 하나가 되며 현재는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서 경북 안동, 의성, 영주, 봉화, 청송군 인근의 61개 말사를 통섭하는 등운산(騰雲山) 고운사(孤雲寺).
 
신라 중기의 고승으로서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신라 문무왕 원년인 서기 681년에 창건, 1천3백여년의 사력(寺歷)을 자랑하며 고색이 창연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물경 29개동의 요사로 흥성했던 그 옛날의 사세를 말없이 표출하고 있다.
 
 의상스님은 문하에 십대중인 오진(悟眞), 지통(知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을 두어 평생을 전교에 전념하며 무수한 도량을 창건한 중에도 십대찰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찰로서 의상 당신의 신행에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데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갑사, 범어사, 미리사, 고운사, 보원사, 옥천사, 청담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타한 사찰은 거의가 인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나 유독 고운사만큼은 의성과 안동 사이를 우측으로 진입하여 무려 삼십여리나 입산한 계곡에 자리하여 창건 당시에는 인적과 교통이 지극히 소외되고 불편하였을 것임에도 사찰을 소개하는 현판에 명기하기를 건물의 동수(棟數)가 한 때는 366동으로 3천여 대중이 수도정진하였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의성군 단촌면 죽계리116번지로 경북 지방의 조계종 본사가 제9 동화사, 제10 은해사, 제11 불국사, 제16 고운사 등 4개 대찰이 있어 전남과 함께 본사를 제일 많이 둔 고장이기도 한데 각설하고 현재의 고운사(孤雲寺)는 의상스님이 처음 창건 당시에는 고운사(高雲寺)라고 이름했던 것을 신라의 명 문장인 고운 최치원이 당시 여지대사와 여사대사의 협력을 얻어 이 절에 기거하면서 우화루(雨化樓)와 가운루(駕雲樓)를 세우고 난 다음 자신의 호를 따서 고운사라 개액(改額)했다고 사기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속 역시 해인사와 더불어 최치원이 시문을 즐기며 이미 쇠퇴한 조국 신라를 구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해인사에서 입멸에 들기까지 많은 승지(勝地)와 명찰을 찾아다니며 불교의 신앙보다는 철학인으로서 인생관과 생리 및 풍수지리학 연구에 더욱 가까이 영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고운사는 그후 제 3대 정종 3년(948)에 운주조통(雲住照通)이 중창을 하였고 제 8대 현종 9년(1018) 천우(天祐)대사가 중수를 했으며 조선조에 들어 숙종 21년(1695) 행옥(幸玉)과 태운(泰雲) 두 스님이 중건했는데 헌종 원년(1835)에 화재로 인해 반쯤 소실된 것을 만송(晩松), 호암(虎岩), 수열(守悅) 등 대덕들이 중수하여 대가람의 면모를 잃지 않고 면면히 유지하여 이 시대를 사는 불자들의 불심을 나투게 하는 도량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부산에서는 영천을 거쳐 의성에 이르고 다시 의성서 안동행으로 북동진하다가 단촌에서 12km를 동으로 달리면 구계리에 이르며 여기서 비포장으로 2km를 더 진입하면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3천여평 개활지 위에 대웅전과 극락전을 포함한 요사 29개동을 만나게 된다. 여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하촌 역시 없어서 외식을 할 적당한 영업집도 없으며 또한 숙박도 여의치가 못함이 흠인데 어느모로 보면 오염되지 않은 도량으로서는 전국 제일의 수행처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등운산은 해발 600m 정도로 산세가 비교적 온순하고 수세(水勢) 역시 빈약하여 주목을 끌기에는 미흡하지만 주차장에서 사찰입구까지의 1km에 달하는 울창한 송림은 가히 탐상할만하다.
 
지국천왕과 다문천왕, 비사문천과 광목천왕을 모신 금강문을 들어서면 자칫 폐가로 치부해 버리기 쉬운 고색의 가운루(駕雲樓)가 눈길을 끄는데 이 건물은 깊은 계곡 위에 밑으로는 물을 흘리며 가로 세워져 있어 자못 우아함을 드리우고 10여년 전에 주지로 부임하신 근일스님이 사찰 사이로 흐르는 계곡을 완전 복개하여 이젠 한 마당이 되어버린 넓은 도량 좌측에 극락전과 적묵당, 설선당(說禪堂), 우화루(羽化樓)가 중심이 되어 관음전, 동서별실금당(東西別室金堂), 회운당(會雲堂), 고운대암(孤雲大菴)이 차례로 묘를 이루며 가람을 배치했고 조금 떨어져 지장기도로 큰 영험과 신심을 자랑하는 명부전이 있어 한 번의 기도에 3시간씩을 계속하여 하루 4차례를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는 긴 세월 이전부터 지금도 이 절을 찾는 불자와 관광객을 맞는다.
 
 복개하기 전에는 계곡이 합치는 삼각주쯤에 대웅전과 고금당(古金堂)이 이마를 마주하고 대웅전에서 기도하고 난 후 대여섯 자욱을 옮기면 고금당에 들어 참선을 할 수 있도록 한국의 보통 사찰에서 볼 수 있듯이 대웅전 앞마당이 넓지 않고 대웅전 추녀 끝이 바로 고금당 선방으로 가람의 배치나 안목보다는 참선과 기도에 최대한의 배려를 한 듯 첫눈에 알아보기가 쉽다.
 
  근일스님은 선방인 고금당의 낙후를 걱정하여 우측 중턱에 30여 선객이 참선 수행할 수 있도록 고금당을 신축하여 이미 해제철인데도 20여 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참선공부에 정진중이고 현 대웅전을 중창하고자 기도와 권선으로 도량 면모 일신에 주력하고 있다.
 
경북 문화재 자료 제168호로 지정된 이 대웅전은 비록 면적은 좁으나 자연석 막돌쌓기를 한 기단 위에 덤덤 주추를 놓고 배흘림 없는 원주를 세워 이룩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인출목(外一出目) 익공식오위가(翼工式五緯架)가 단층 맞배지붕으로 내부의 천정은 연동으로 되어 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비교적 작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가량수법(架樑手法)이 정교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로 좋은 본보기를 이루어 문화재 자료 지정답게 고색을 자랑하고 있다.
 
사지(寺地)가 계곡을 따라 협소하게 자리하여 배치가 다소 부자연스러운 대신 계곡을 끼고 울창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흡사 고궁을 연상케 하는데 이 도량의 문화재로는 불사를 하기 전에는 금강문 옆에 있던 약사전을 지금은 대웅전 위쪽에 신축하여 이실(離室)한 새 건물 약사전에 비교적 적고 정교한 석조 석가여래좌불이 보물 제246호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재료는 화강석을 섰다. 불상이 높이가 79cm 이고 무릎의 폭이 65cm, 대좌의 높이가 72cm, 광배의 높이 1.34m로 8각 연대상에 정좌하고 광배를 구존한 좌상이다.
 
대좌의 8각 지대석에는 각 면에 1좌의 면상(眠像)이 둘려 있고 복연석(伏蓮石)에는 연화가 둘려 있다. 중대석은 팔각주로써 주형(柱刑)을 나타냈으며 광배는 두신양광(頭身兩光)을 구별하였으되 원형 두광 중심에 연화문이 있고 주위에는 당초문(唐草文), 신광 주위에는 보상화(寶相花)가 장식되어 있다. 이 상의 모형제작은 신라 통일기 불상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비교적 짧은 동체(胴體)로 인하여 약간 위축된 듯 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가운루에서 우측 1백m 언덕에 고운사 3층 석탑과 과히 오래지 않은 고운사 사적비가 있다.
교통과 인적이 드물어 자연히 소외되어 오던 것을 근일스님이 가람면모 일신에 주력하여 지난해에는 단촌에서 구계리까지 12km에 달하는 2차선 도로를 완비하고 아스팔트포장을 하여 교통의 취약점을 말끔히 씻었으며 계곡의 협소성을 일소하고자 1백여m의 하천 복개로 이젠 마치 넓은 운동장을 연상케하는 가람 위에 무설전과 선원, 약사전을 신축, 아직 단청은 마치지 못했으나 산만한 가람배치를 절도있고 짜임새있게 조화하였으며 고운사란 현액이 나붙은 강당 바로 위쪽에 장엄 사찰의 규모를 알리는 범종각을 세워 1천5백관의 동종을 달아 하루 세차례Tlr 울려 지옥의 중생에게 구제의 소식을 전하고 운판을 달아 공중의 중생에게 성불의 기를 전하며 또한 목어를 울려 수중의 중생에게 불음을 전하여 공덕을 알리고 법고를 시방에 일갈하여 지상의 중생을 이고득락토록 사물을 완비하니 수행불사와 포교불사, 가람수호불사를 시작한 지 10여년이 세월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3.  이제 남은 일은 대웅전 중창과 신축건물의 단청, 그리고 주차장의 포장 등인데 하루 4차례에 걸쳐 3시간씩 지성으로 드려 12시간의 명부전 지장기도를 근간으로 지장도량답게 기도소리 등운산 자락을 울리는데 이처럼 오지사찰(奧地寺刹)로 일반 고찰에서 볼 수 있는 관광객의 기웃거림은 거의가 볼 수 엇고 또한 국립공원지역도 아니라 입장료는 애시당초 생각도 하지 않으며 도로포장 전까지만 해도 신도의 참배가 거의 없었으나 차량의 증가와 교통로의 치장에 힘입어 이젠 전국의 불자들이 화엄기도도량이란 점과 16교구 본사, 또한 지장기도를 위해 부단한 신도행렬이 이루어짐에 근일스님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정기법회일로 설정, 설법과 지장기도 및 철야정진을 독려하여 참석인이 5백여 사부대중에 달하여 산사의 고요를 벗하며 수행 및 포교불사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미 ·1천여 성상전에 천하를 주름잡던 명문장 최치원이 이곳에 들러 스님들과 교분을 나누고 불법을 공부하여 우화루와 가운루를 세워 자기의 호를 따 고운사라 이름하였으니 익히 풍수지리적이나 부처님의 기도처로는 의상스님의 선지(選地)를 받았으니 말대의 범부중생은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석학으로 12세에 당으로 가서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 내외관직을 역임하다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 도총 황병(黃騈)의 종사관으로 종군하면서 서릿발이 서리도록 통쾌무변한 토황소적문(討黃巢賊文)을 지었는데 이것이 인심을 크게 감동케하고 이때부터 그의 문명이 중원에 떨친 신라의 문사이다.
 
그는 헌강왕 11년에 귀국하여 시독(侍讀)겸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 십여조(十余條)를 진언하였지만 이미 쇠세(衰世)를 구할 수는 없는지라 벼슬을 버리고 산해(山海)간을 방랑하며 시문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해인사에서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선계(仙界)에 들었다고 일컬었다.
 
 이런 시성(詩聖)이 이 고운사에 거처하며 우화루와 가운루를 세워 가람의 확장을 꾀한 것을 보면 이 고운사의 존재 필요성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익히 적자생존의 원리처럼 차고도 남음이 있으며 후학들이 어지 관리하며 부흥시키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고 있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만을 선호하는 세태가 계속 만연하다 보면 역사성이나 민족의 얼쯤은 잠시 없어져 남의나라 문화에 길들여지는 주체없는 민족이 될 것이므로 우리의 선조와 역대 고승 대덕, 특히 의상과 같은 큰스님이 창건을 하였으니 이 고운사야말로 불자들이 힘을 합하여 호지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본지에서 한국의 사찰로 16번째 취재를 조계종의 16교구 본사를 탐방함은 무슨 인연인지? 기자를 보내는 근일스님은 배웅사에서 ‘불심은 곧 국가와 민족을 바탕함으로 가람의 흥성이 국가의 발전과 같은 맥락이어서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줄 이 도량을 여법하게 중창하여 일면 호법하고 일면 호국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진하며 부처님의 가람 확장불사에 임하는 중’이라고 다부진 결의를 들려준다.  금강문을 향하여 합장을 하는 기자의 등 뒤로 등운산을 비추는 늦봄 태양은 더욱 자비롭다.
 

 
오대산 월정사

문수보살과 함께하는 오대신앙
 
  초록빛 잎사귀 위에 살포시 얼굴을 내민 연꽃이 수면을 메워나가고 햇살마저 무지개빛으로 화사한 초여름. 무심히 핀 풀꽃마저도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부터 그 몸짓과 향기를 달리하고 있음은 무슨 이유인가.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이같은 복덕이 중생과 함께 하고자 한 그 뜻이 있음이다. 그러한 뜻이 이 국토 어느 곳엔들 배여있지 않을까마는 오대산(五臺山)은 이 민족의 정신 속에 공통으로 흐르는 묵중한 무게로 흔들림없는 심지를 뿌리내려 주었고, 월정사(月精寺)는 적요 속에 무한의 포용력을 갖추었다.
 
너른 평야보다는 산악지대가 많아 산을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이 자연스레 갖게되는 산에 대한 외경심은 지리산의 성모와 가야산의 정견모주(正見母主)로 같은 산신(山神) 등을 통해 나타나 있고, 여기 오대산에는 진성(眞聖)의 거주로 신성함이 표출되었다.
 
진성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은 물론 월정사의 개산조 자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장이 중국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석상(文殊石像)에서 7일기도를 드리고 전해받은 게송을 풀기 위해 고민하던 중 홀연히 나타난 한 스님으로부터 그 풀이를 듣고 더불어 가사와 불두골(佛頭骨), 바루 등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당신의 나라 동북방명주 경계에는 오대산이 있고, 그곳에는 일만의 문수가 항상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오대산은 보현의 아미산, 관음의 보타낙산과 더불어 3대영산으로 꼽힌 곳이니, 자장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실현한 그 곳을 자신의 조국에서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시작된 오대산 신앙과 월정사.
자장의 문수친견 위한 월정사 창건 삼국유사의 보질도(寶叱徒)와 효명(孝明) 두 태자의 기록은 도
애산 신앙과 신비로움을 구체화하고 있다. 보질도와 효명 형제 두 사람은 함께 오대에 나아가 공경 예배하고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를 다려 1만 진신의 문수에게 공양하였고, 동대(東臺)․서대(西臺)․북대(北臺)․중대(中臺)의 오대에는 각각 1만의 문수가 상주하며,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대성(文殊大聖)이 매일 이른 아침 현신하여 36형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분의 문수보살로도 표현할 수 없어 오대에 각각 1만씩의 문수보살을 상주시킨 오대산의 공덕과 자장의 염원이 필설로 설명되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오대가 동서남북의 사방을 근거로 청(靑)․백(白)․적(赤)․흑(黑)으로 배색,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과의 습합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별도로 관음․미타․l장․석가․문수 등의 오대산은 진성이 거주하는 성지임을 강조하며 월정사 창건의 토대를 이루어 주었다.
 
오대산을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했던 자장이 처음 이 곳에 온 것은 그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해인 선덕왕 12년 (서기643년) 이었다. 자장은 임시로 띠집을 짓고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자했다. 그러나 그가 머물던 3일동안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 월정사의 시작인 것이다. 자장은 훗날 다시 8척방을 짓고 7일 동안을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자장은 문수진신을 친견하고자 했던 처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대산의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녔는데 그 때의 자취로 원녕사(元寧寺)와 정암사(淨岩寺) 등의 사찰을 남겨 놓았다. 이렇게 시작한 월정사는 대규모의 창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룡사탑 ․ 태화탑․통도사계단 등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고서 이 곳 오대산의 중대에 그 나머지를 봉안한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대, 서대, 남대, 북대의 네 절을 지어 중대는 기도처로 나머지 4대(臺)는 수도처로 삼을 수 있었고 이후로 큰 절 월정사 또한 그 깊은 오대산 중에서 끊이지 않는 인맥과 불맥으로 발전되어 갔다.
 
자장의 창사 이후로도 신효거사(信孝居士), 신의두타(信義頭陀), 유연장로(有緣長老) 등이 서로 계속해서 절을 경영해와 세상에는 사성소주자(四聖所住者)라 하여 알려진 것이다. 한편 월정사란 이름 짓게 된 유래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오대의 동대에 해당하는 만월산(滿月山) 아래에 세워졌던 수정암(水精庵)의 정(精)과 만월산(滿月山)의 월(月)이 합해졌다는 이 추측은 동국여지승람, 수정암에 신라의 두 왕자가 수선했다는 기록과 함께 월정사와 별개로 기록되어 있어 신빙설을 절감시키고 있지만 문수보살의 오대산이 자장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당시 자장의 자취마다에 남겨놓은 사찰이 따지고 보면 다른 의미일 수 없다.

월정사의 개산조 자장율사
 
  순박하고 곱기만 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 경포대가 있고 오죽헌의 절경이 그림같이 펼쳐진 강릉에 이르러 하늘과 바다는 공히 회색빛을 띠어 한 차례 비를 예고했고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월정사로의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월정사의 개산조 자장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은 기무림의 아들이다. 생일까지도 4월8일 부처님과 같은날 세상에 출생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양(津梁)이 되게 하겠다는 부모의 서원은 그가 전생부터 불법과의 인연을 위한 복덕을 갖춘 인물임을 알려준다.
 
 그의 성품과 지계에 대한 의지는 조정에서 진골출신의 그를 재상자리에 앉히려고 불러들였을 때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한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고, 그를 신라시대 귀족불교의 표상으로 백안시하는 견해를 보류시킨다.
 
 자장이 선덕왕의 요청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와서 어려운 국내사정을 살펴보고 왕에게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을 건의한 것에는 자장의 호국정신과 3국통일에의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불력에 의한 호국의 소박한 신앙심 뿐 아니라 여왕을 모시고 있는 황실의 권위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한 황실적인 필요성이 함께 내재한 것이다.
 
 귀국 후 자장의 활동은 호국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활동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를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확립이었다. 그는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講)하기도 하고, 황룡사(黃龍寺)에서 7일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기도 했다.
 
조정에서 그에게 대국통(大國統)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어 전국의 모든 승니를 관장케 하자, 자장은 승니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도록 하고, 한 달에 두 번씩 계를 설하게 하며, 순검사(巡檢使)를 전국에 파견 지방의 사찰을 일일이 살펴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는 한편 불경과 불상을 정중히 모시도록 하는 등의 기강잡기에 전력을 다했다.
 
이같은 자장의 노력은 신라야말로 예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불국토사상으로 대변 되어졌다. 일생토록 활발한 활동을 펴 왔던 자장이 말년을 보낸 곳은 오대산이었다. 계의 엄격함과 불교 교단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했던 자장은 자연히 매우 규범적이고 엄격한 윤리적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오대산은 마지막 가르침을 전해주었으니, 그가 문수보살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옷이 남루한 늙은 거사가 죽은 강아지를 담은 삼태기를 메고 와서 시자에게 “자장을 만나보러 왔다”고 하자 시자는 안으로 들어가 자장에게 고했다. 자장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시자는 남루 방포한 거사를 꾸짖어 내쫓으니, 그 거사는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갖고 있던 삼태기를 거꾸로 털자 삼태기 안의 죽은 강아지가 땅으로 떨어지며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변했다. 그제서야 문수보살임을 알아챈 자장이 뒤늦게 따라가 보았지만 그 빛은 아득히 사라져 따를 수 없었다.

성역으로 보전돼야 할 월정사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가 월정사의 일주문에 들어서면서 더 굵어졌다. 비를 맞아 더 맑아진 모습이 된 숲길을 따라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寂光殿) 앞에 섰다. 전내에는 석굴암의 불상과 그 형태가 동일하다는 대불이 조성되어 있다.
 
지권인(智拳印)을 그 수인으로 한 비로자나불의 장엄함은 금당 앞 월정사의 자랑거리인 팔각구층탑의 화려함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환희심을 불러낸다.적광전의 위용과 걸맞게 힘차게 써내려간 주연의 눈길이 멈췄다.탄허(呑虛)스님의 친필이다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畿千秋
  眞身舍利金猶在
  普使群生禮不休
 
  현존의 월정사는 6․25의 참화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초토위에 다시 건립한 당우다.
  이 일로 사중의 귀중품이 모두 재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중 선림원의 신라범종이 소실된 것은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팔각구층석탑 역시 화재로 인해 많은 열을 받아 법당 쪽으로 다소 기울어 있었으나 근래에 해체 수리하여 바로 잡았다.
 
 많은 장식적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이 탑에는 중대의 적멸보궁과 마찬가지로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탑 앞면에는 정확한 명칭과 알 수 없는 석조보살좌상이 불사리탑을 향하여 정중하게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불탑에 대한 공양을 표하고 있다.
 
도량중창불사를 마감해가고 있는 월정사는 진신사리 찬탄법회, 오대산 신앙의 조명등을 통해 오대산의 성역화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뿐만 아니라 북방제일 선원이라는 명성을 날리던 청량선원을 다시 개설한다는 원력을 세워놓고 있기도 하다.
 
특히 유아교육에 관심을 갖고 근처 12군데에 유치원을 개원해 취학 전 아동들에게 일찌감치 불심을 심어주는가 하면 월정사 장학이라는 이름으로 1인당 10만원씩 연간 2백4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미결성의 영동불교장학재단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히 해나가고 있다.
 
월정사는 진부면으로부터 강릉으로 통과하는 국도변에서 30리나 되는 산속에 있다 오대가 있는 상원사 주변까지는 무려 24km 가 넘는다.
 
이렇듯 그윽한 산세에 자리한 상원사까지라도 오대산을 찾은 바에야 둘러가지 않을 수 없다. 상원사의 성덕대왕 동종도 보아야 하고 청량선원 앞에 서서 이 곳에 새로이 모여들 눈푸른 납자들의 의기도 느껴보아야 한다.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의 도량 금산사
 
  전북 김제의 너른 평야를 시야에 담을 수 있는 이 길의 끝에는 모악산(母岳山)의 봉우리가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고 그 아랫자락에 천년 세월 미륵 부처님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을 만날 수 있다.
 
 기다림이란 때로 고통과 절망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애틋하고 간절한 희망과 믿음이 우세하지 않고는 끝까지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끝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결과를 초래했어도 끝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이 또한 기다림의 미학(美學)이기도 하다.
 
인간은 평생토록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늘 반복되는 기다림 이외에도 자신의 완성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을 기다리기도 하며 때론 극락정토의 큰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이러한 기다림으로 인해 인생은 한 발 한 발 앞을 향해 내딛을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이리라.
 
미륵신앙이란 것도 어찌보면 이런 인간 심리에 따른 자연스런 산물일 수도 있고, 이런 이유로 미륵부처님의 도래를 반신반의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륵부처님의 도래를 굳게 믿고 극락세계의 큰 염원을 세운 이들은 그 기다릴 수 있는 힘으로 해서 미륵부처님이 아니어도 스스로 극락정토를 만들어 나갈 역량이 생겨나고, 그런 사람이 하나 둘 모이면 결국 이 세상은 미륵부처님이 도래한 것과 꼭 같은 세상이 될 수 있다.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도 자비에서 구해야 한다. 큰 슬픔어린 눈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큰 슬픔으로 갖게 되는 기다림을 금산사에서 배워가야만 한다.

모악산에 개산한 금산사의 시작
 
  따스한 햇살과 풀내음을 실은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길이 금산사 일주문을 향해 쭉 이어져있고, 칡으로 즙을 내어 여행객에게 향토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는 초여름 오후의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늘에서 잠이 들었다.
 
일주문 바로 앞까지 벌서부터 모여든 행락객들로 인해 엄숙한 사찰의 분위기를 위협하기도 하지만 어떠랴. 이 민족이 이 강토에서 마음놓고 쉬었다가 삶의 향기를 재충전해 갈 곳이라고는 사찰의 향기와 손길이 어려있는 곳 밖에는 없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한국의 사찰들은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으리라.
 
 몇 백년의 세월을 통해 자람을 해나온 수령 깊은 나무가 금산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서 있다.
  하지만 이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이전에도 이같은 이름 모를 꽃이며 나무가 피었다가 쓰러지고 다시 성장해 나가기를 몇 차례나 거듭해 왔었다. 쓰러진 풀과 나무가 거름이 되어 다시 피어나고 자라난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는 밑거름이 되어준 그전의 나무며 풀을 연상해 내야 한다.
 
  이렇듯 모악산은 이 나무가 심어지기 이전부터 넓은 가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산사가 이 곳에 자리를 틀면서부터 모악산은 비로소 개산할  수 있었다.
 
 무성한 숲과 뭇짐승들이 깃들인 이 곳에 당우와 불탑이 세워지고, 극락정토의 의지를 밤낮으로 키워나가는 수도자들이 모여들고 그 속에서 산출되어진 문화가 백성들의 정신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나갈 수 있게되면 무의미하게 서 잇던 그 산은 비로소 이름을 얻고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악산과 금산사는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뿌리에서 태동 되어졌다 할 것이다.
 
오랜 내력을 지닌 사찰의 초창이 늘 그러하듯 금산사 역시 그 시기와 개산조가 분명하지 못한 채 문헌마다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사적(事蹟)」에 의하면 금산사의 창건은 백제 법왕 원년으로 법왕이 즉위하자마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승 38명을 득도시켰다고 한다. 「사지(寺誌)」에는 백제 법왕 원년에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 금산사가 세워졌지만 이 때의 금산사는 그 규모나 사격(寺格)으로 별로 큰 사찰이 못되었으므로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한 중창을 개산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를 창건한 것으로 착각하는 기록을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진표가 출가하기 이전, 경덕왕대에 이미 금산사는 창건되어 있었고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가 중창을 이룩한 혜공왕대(惠恭王代)에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백제 법왕의 자복(自福)을 빌기 위한 개산이었든지, 왕위를 놓고 아들 신검이 아비 견훤을 감금시킨 비정이 서린 곳이든간에 금산사 초기의 무거리를 더듬으면서 우리는 진표율사에 의한 미륵신앙과 법상종의 근본도량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진표의 참회구도 그리고 미륵신앙
 
  모든 존재의 성질과 모습을 탐구하는 실재론적 입장의 불교에서 일체의 요소에 대하여 연구하는 법상종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승 불교의 기본이념과 배치되고 있으므로 해서 학문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종교성의 결여는 현재 그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긴 하다.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법상종과 금산사와의 인연은 고려시대 금산사가 법상종(法相宗)에 속해 있었으며 「법장현찬(法華玄贊)」 「유식사기(唯識史記)」등 법상종 관계의 장소(章疏)들을 간행하고 있었던 사실과 진표율사 이후 금산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일신하는데 주역을 맡았던 혜덕왕사가 해린국사로부터 법상의 배운 법상종의 대종사였다는 점이다.
 
현재 법상종의 근본도량이었던 과거의 역사를 소급해 보는 일을 금산사에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진표에 의한 미륵신앙의 흔적은 금산를 대표하고 있다.
 
어려서 활을 잘 쏘던 진표는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하면서 자라났다. 어느 날인가 예의 사냥길에 나섰던 진표가 개구리를 잡아 나뭇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던 것을 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 우연히 그 곳을 지나다 자신이 지난 해 잡아 두었던 개구리가 그 때까지 살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잘못을 뉘우치고 12세의 어린 진표는 구도의 길을 떠난다. 그는 일찍이 당에 유학하여 선도삼장에게 수업하였고 그후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오계를 받기도 했던 것이다.
 
 진표는 독특한 참회수행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날 스승 순제법사는 진표에게 사미계법을 주고 「공양차제법(供養次第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너는 이 계법을 지니고 미륵과 지장의 양성(兩聖) 앞에서 간절히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고 하였다.
 
율사의 나이 27세 되던 해 약간의 양식을 가지고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으로 들어간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를 받지 못했다. 이에 발분한 그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고, 이때 홀연히 나타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율사는 다시 뜻을 발해 3․7일을 기약하고 온 몸을 바위에 두들기듯 참회를 하여 3일째 되던 날은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져 나갔다.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는 그를 가호하여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는 감응을 얻기도 했다.
 
 드디어 3․7일이 되던 날 천안을 얻어 도솔천궁이 내려오는 형상을 보게 되던 것이다.  이 때 지장보살은 계본을 주고, 미륵보살은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를 주었는데, 그 목간자를 통해 전생의 업보를 알 수 있게 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런 후에 그 지은 죄를 참회하는 정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토록 팔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돌에 몸을 던지는 등의 사신을 통한 참회의례로 반석 같은 구도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미륵보살로부터 전해받은 목간자를 이용, 점찰법회를 열어 타락한 윤리에 대한 반성과 참회의지를 고취시켰고, 이는 죄를 참회한다는데 기본적인 목적을 갖고있는 대중교화의 한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받은 진표가 산에서 내려와 대연지(大淵津)을 지날 때 나타난 용왕은 옥과 가사를 전해주었고, 그 용왕의 8만 권속의 도움으로 금산사의 중창을 이루기도 했다고 전한다. 또 그는 금산사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모시고 미륵보살이 계법을 주던 모습을 금당 남쪽벽에 그려 넣을 만큼 그에게는 미륵보살이 매우 중요했다. 진표의 전기기록들이 그를 한결같이 율사로 말하고 있듯이 진표는 계법을 중요시 생각했고, 진표의 계법은 대승보살계사상(大乘菩薩戒思想)에 의지하고 있었다.
 
 「점찰경(占察經)」이 대승보살계의 근본을 이루고 있고 미륵보살의 설계(設戒)가 또한 대승보살계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음에서 그의 미륵에 대한 두터운 신앙을 알 수 있음이다.

수난의 역사를 감내해 온 금산사
 
  신라 법상종의 대가람 금산사에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 중에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후의 조형물이다.  모든 당우와 전각들이 임란으로 인해 소실되는 안타까움을 보였는데, 이는 임란 구국의 3화상 중 뇌목당 처영(處英)의 승병 본거지가 금산사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후에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하여 5여래6보살과 오백나한을 모셔둔 대적광전(大寂光殿)과 금산사 미륵신앙의 정수 미륵전내 본존불의 소실 등은 참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금산사의 안쪽 서전(西殿)에 계시는 스님 한 분은 7년 전 이 곳에 머물면서 볼 수 있었던 대적광전의 불보살님의 상호는 물론이고 뒤쪽 안벽에 관세음보살벽화의 장엄했던 모습을 떠올려 주셨다.
 
 “그 벽화를 그린 작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요. 다만 어는 수좌가 이 곳에 하룻밤을 머물고 간 뒤 조성되었다는 신비한 벽화였지요”  이렇게 여러차례의 소실과 퇴락 속에서 근래에 금산사의 면모
를 일신시킨 분은 현주지 월주스님의 공로가 크다. 스님은 주지 취임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의 정비를 통한 수도처의 면모를 갖춤은 물론이고 전북지역내의 고찰 중수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중생을 위한 민중불교를 말하는 월주스님은 항상 중생과 아픔을 같이 나눈다는 생각으로 자비와 용서, 포용의 마음을 가져야한다고 늘 주장할 뿐 아니라 금산사 근처 원평이란 마을의 청년회 활동 지원을 위해 연간6백만원의 지원금을 책정해 보조해줄 만큼 금산사 뿐 아니라 전북내의 불교활성화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미륵전과 대적광전의 불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다. 국가의 지원과 신도들의 시주금, 현 주지 월주스님의 원력이 한데 모아진 이 대불사가 원형의 복원과 고찰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어 좀처럼 발 빠른 진행을 보이고 있진 못하다. 하지만 기어이 회향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보게 될 미륵전의 위용을 떠올리며 하산한다. 위용을 떠올리며 하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