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의 사찰(전등사,낙산사,구인사,마곡사,보경사,관음사,화음사)
작성자 마이템플 등록일 08-03-16 13:57 조회수 1,333
 
 
정족산 전등사

1.  낙조가 길게 자락을 드리운 반도의 서쪽 끝에 점점이 자리한 섬들이 무거운 그림자로 내려앉은 그 곳은 한민족(韓民族) 태동의 신비를 감추고 아득히 먼 회상에 잠긴다. 동해가 일출의 장관을 자랑하고 있다면 서해는 한낮에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던 태양이 마지막 정열을 내뿜으며 몸부림치듯 산하를 휘감고 도는 붉은 기운으로 해서 또 다른 감각의 장관을 연출하며 짝을 이룬다.

아무리 젊은 혈기를 지닌 사람이라도 서해에 끈끈한 해변 위로 떨어지는 붉은 노을에 하루의 마감은 물론 인생의 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때 비로소 인간은 한 생각을 달리 할 수 있게 된다. 벼랑 끝에 서서 하루의 삶을 아니,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볼 수 있을 때, 저 하늘이, 이 산하가 무엇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고, 존재해 나가는가 하는 의문을 자신에게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국토에서 다섯 번째로 크다는 섬, 강화도. 섬이라는 한 생각 때문에 제주도 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어느새 육지와 연결된 다리 덕분에 이제는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곳이다. 한 민족이면서 마치 철천지 원수라도 되는 듯 대치하고 있는 북한과 가깝다는 이유로 검문이 심하고 그래서 약간의 긴장감도 들지만 이런 이유로 더 별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곳이다. 점점이 자리한 군도(郡島)를 총섭하는 강화도의 정상을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을 제사하는 마니산이 지키고 있고, 한국의 올림푸스인 마니산으로 해서 강화도의 표정은 더욱 무겁기만 하다.

우리의 역사를 통람해보면 강화도 전체는 국토방위를 위한 전적지로서의 사적가치가 눈길을 끄는 곳이다. 많은 전설을 간직한 강화도의 남단에 정족산이란 산이 있고, 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의 세 아들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로 하여금 쌓게 한 천혜의 요새로 민족의 수난과 극복을 몸으로 대변하고 있다. 국난극복의 현장은 이외에도 삼별초의 대몽항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강화도 조약 등 섬 전체에 남겨진 상흔이 가엾기까지 하지만 한편으론 고려대장경의 조조(彫造)라는 위업을 달성해낸 곳이기도 한 것이다.

불교학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는 고려대장경은 거의 모든 범본(梵本)과 파리어본(巴利語本)이 소멸된 오늘날 가장 완벽하고 신빙할 만한 자료라는 점에서 우리만의 국보가 아닌 세계 공통의 보물로 남아있다. 이러한 대장경의 조조(彫造)를 위한 대장도감이 강화에 설치되고 이것은 외침을 물리치려는 민족의 의지가 불력으로 합일되어 나타나진 것이니, 그 원력은 내내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2.  강화도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역사적 배경의 회상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속에 문득 고개쳐든 앞길을 가로놓인 성문이 막아선다. 이것이 정족산의 삼랑성이다. 단군의 전설을 간직한 마니산을 뒤로 하고 산봉우리 셋이 나란히 솟아 오른 그 모습이 마치 솥의 세발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정족산(鼎足山)이다. 이렇듯 자연스레 이루어진 외호(外護)에다가 덧붙여 축조한 삼랑성의 남쪽문을 통과하여 호젓한 산길의 청량함 속에 걷다보면 넓은 구릉지 위에 전등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인근의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소풍을 와 있어 경내는 외롭지 않다. 대웅전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이들에게 강화도의 마니산과 그 곳에 얽힌 전설, 국난극복의 조상혼을 아무도 일러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에겐 딱딱한 책상이 아닌 풀밭과 나무 아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즐겁고 명부전에 모셔진 십왕(十王)의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나이 어린 그들에겐 의미없는 가르침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의 사찰이 언제부터인지 박물관의 기능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든다.

삼랑성 내에 위치하는 전등사는 일종의 산성사찰로서 국방과 왕실의 수복을 비는 이중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전(寺傳)에서 밝히는 대로 사명을 전등사라 한 것이 원비(元妃)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을 헌납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하지만 전등의 의미는 그 곳에만 있지 않다. 해사(海史) 임승익이 지은 대조루중건모연문(對潮樓重建募緣文)에서는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제상승(師弟相乘)의 법등을 전했다는 의미와 함께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 가섭존자에 의해 미래세에 오실 미륵부처님께 석가여래의 법등을 전해주기 위해 그 신표로서 의발을 간직하고서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산)에서 멸진정에 들어있다는 것과 상호 연관되어져야 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초창에서는 이렇듯 깊은 의미를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듯 깊은 의미를 부여할 후손이 나타났다면 전등사는 이런 계기로 그 의미를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게 되고 이것은 어느 분야에서든지 반드시 필요한 발전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궁주의 옥등에 절 이름의 유래를 두기보다는 진리를 전해주는 법등에 그 무게를 두자는 것은 전등사를 미화하자는 것이 아닌 불법에 대한 하나의 의지표명인 것이다.

진리의 법등을 지키는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요,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지나온 역사를 소중히 생각하고 지켜나가자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전등사의 장사각(藏史閣)은 다시금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는 등 서해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강화도의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372년)에 아도화상이 개산하고 진종사(眞宗寺)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 이후의 기록은 고려시대까지 보이질 않는다. 무명의 수도승 몇이 지나쳐 갔을 것이다.
 
진종사로 개산한 이 가람의 터를 새롭게 일으킨 이는 충렬왕비 정화궁주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전등사의 기록을 보면, ‘원나라 지원(至元) 19년에 충렬왕비 정화궁주 왕씨(貞和宮主 王氏)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바다를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인출 전등사에 보관토록 했다!’고 적고 있다. 고려말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이 어느날 전등사의 대조루에 올라 읊은 시에도 충렬왕비 정화궁주의 원찰(願刹)이었음을 보이고 있다.

  星歷蒼茫伍太史 (성역창망오태사)
  雲煙羡縹姻三郞城 (운연표인삼랑성)
  貞和願幢更誰植 (정화원당경수식)
  壁記塵昏傷客情 (벽기진혼상객정)
  세월속의 역사를 오태사가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三郞城)에 아득하다.
  정화궁주의 원당(願幢)을 뉘라서 고쳐 세우리.
  벽기(壁記)에 쌓인 먼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고려 제 25대 충렬왕은 원종의 장자로서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세조의 달과 결혼하고 살다가 원종이 죽은 뒤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즉위한 충렬왕은 종실 시안공총(始安公總)의 딸을 책하여 정화궁주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궁주(宮主)와 공주(公主)는 서로 심한 질투를 했다. 그런 가운데 ‘정화궁주가 사랑을 잃고 무녀를 시켜 공주를 저주한다’는 투서가 있어 궁주가 갇히기까지 했던 것이다. 곧 풀려나긴했지만 공주가 죽을 때까지는 왕과 통하지 못한 채 항상 별궁에 거처해야만 했다. 이처럼 왕의 사랑을 잃고 별궁에서 외롭게 지냈던 정화궁주가 전등사를 그의 원찰로 삼고 복을 빌었던 것이다. 그 이후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고려 왕실의 귀의와 비호를 받아왔다.

조선시대로 넘어와 선조 38년에 불이 나 전등사의 반 가량을 태웠고, 9년 후인 광해군 6년 12월 초 하룻날 또 다시 불이 나 나머지 건물 모두를 불태우는 비운을 맞이하여 당시의 사승 지경(志敬)등이 중심이 되어 이듬해 4월 전등사의 재건을 시작하였고, 옛모습을 되찾은 것은 6년 후인 광해군 13년의 일이었다. 현종 원년 유수(留守) 유심이 선원각과 장사각을 향산으로 옮겨짓고, 숙종 4년에 이르러 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전등사는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다시 숙종 33년에 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하게 되면서부터 왕실의 관심이 전등사로 쏠리게 되었고, 1726년 영조가 이곳에까지 친임하는 열의 속에 취향당(翠香堂)의 제액을 친히 써서 고쳐 걸게 하였고, 영조 10년에는 곡식 수십석을 전등사에 주기도 했다. 한일합방 이후 한국불교는 일제총독의 치하에서 새로운 체제로 개편되기 시작했는데, 1911년 사찰령 시행규칙이 발표됨으로써 불교교단은 조선불교 30본산으로 형성, 30개의 교구역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 때 전등사는 강화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3.  강화도에서 불교의 세력은 매우 미약하다. 스님들에 대한 공경심도 잘 표현할줄 모르는 신도가 태반이고 불심도 그만큼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등사에서는 강화읍에 유치원을 건립, 어려서부터 불교에 대해서 친숙하고 관심을 가질 어린 불자를 키워나가는데 노력하고 있다. 그 외에 향로전과 종각을 짓는 불사에 임하고 있다.

아침저녁 밀려오는 조수를 대하고 있는 2층의 당당한 대조루(對潮樓)를 지나고 나면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나타난다. 내부천장의 화려한 연화무늬와 함께 눈에 띄는 것은 귀공포에 나무로 깎은 나녀상이 대웅보전의 무거운 추녀를 받들고 있어야 하는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또한 회주 소무현 백암산의 숭명사에서 주조된 철제종이 한때 일제의 공출에 의해 전등사를 떠났다가 다행히 본래의 장소로 돌아오는 불보살의 가호를 받았다.

전등사 바로 아래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하나 있다. 일제 때 공출이 심하여 심지어는 생산량보다 더 많은 공출을 요구하자 이웃한 백련사에 추송선사라는 신승을 전등사에서 청하여 3일간의 기도끝에 은행이 하나도 열리지 않게 되었다 한다. 일제의 공출이 사라진 지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은행나무의 신세가 처량하다.

 
동해 낙산사

낙산사와 관음신앙

  신라 문무왕 12년 의상대사에 의해 현실구복의 상징처로 개창된 동해의 낙산사(洛山寺). 비릿한 해풍에 진작부터 예감할 수 있는 동해의 절경이 코앞에 다가서는 설레임은 더 큰 감동으로 이어져 눈부신 6월의 태양과 함께 기막힌 정서를 자아낸다.
 
동양최대의 해수관음보살로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해진 낙산사를 찾는 이 현실은 다시 한번 의상과 같은 현세구복의 강인한 의지처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대관령의 험준함이 속세를 막아서고 푸른 바닷물결에 온갖 시름마저 씻겨나간 이 곳에서 느껴지는 현실의 고통과 중생의 괴로움 같은 것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는 달리 이 곳은 먼 옛날 의상의 개창 때부터 이어진 현세구복의 의지가 현재까지 꺾이지 않고 오롯한 곳이다.
 
 함형원년(咸亨元年) 당의 종남산 지엄화상에게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의상은 곧장 출렁이는 동해의 푸른 물결이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해변의 야트막한 야산을 찾았다. 이 곳은 일찍이 당에서부터 친견한 바 있는 관음보살로부터 지시받은 곳이기도 했으며, 신라땅이 예부터 불교와 무관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관음보살의 상주처가 있다는 의상 자신의 믿음이 깃든 곳이기도 했다.
 
 낙산(洛山)이란 서역의 보타낙산의 산스크리트어 음역이다. 그곳은 자비의 화신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믿어진 곳이니, 당연히 이름없던 동해의 야트막한 야산은 낙산이란 이름으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스님이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재계(齋戒)한 지 7일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용중(龍衆)과 천중(天衆)등 팔부의 시종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했다. 거기서 하늘과 용이 수정염주 한 꾸러미와 여의주 한 알을 주는 것을 얻고 다시 7일 동안의 기도에 들어갔다.

이에 드디어 관음의 용모를 보았고, 관음보살은 의상에게 “좌상의 산꼭대기에 한쌍의 대(竹)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잇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전한다.  이에 좌상의 산꼭대기 대가 솟아오른 것을 목격한 의상이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셔 관음의 진신이 산주함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로써 낙산사는 관음신앙을 꽃피울 터를 잡아 그 뿌리를 내려나갔다.

체험종교로서의 의상

  의상 하면 신라에 화엄선풍을 일으킨 인물로 쉽게 기억에서 떠올려진다.
당에서 중국 화엄종의 2조인 지엄에게 8년간 화엄학의 기초를 다졌고, 그의 학풍을 이은 제자로서 예우를 받고 있던 의상의 귀국동기는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본국에 알리는데 있었다. 한편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는 그의 귀국은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후자의 원인이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서둘러 귀국하게 된 것은 전자의 원인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충절은 동해에 자신의 왕릉을 지정할 정도로 신라 사직과 불교를 함께 숭상한 문무왕과 함께 신라의 불국토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낙산사의 창건이었다. 화엄학의 교지를 펴기 위한 부석사의 창건이나 수 많은 제자의 배출, 화엄십찰의 건립 등은 그 후의 일로서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신라 화엄학의 종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내기 위한 터전이었다면 그가 앞서 행한 낙산사의 창건은 바로 의상의 체험종교를 확인할 수 있고, 현실구복의 관음신앙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의의를 담고 있음이다.

의상의 일생에 걸친 구도행각과 3천여명이 넘는 제자와 당시 아성(亞聖)으로 불릴만한 열명의 제자를 배출한 교화 못지않게 그에 의해 시도된 체험종교도 사실은 화엄학을 그 바탕에 두고 있는 일이어서 그의 일관된 사상과 실천이 돋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화엄학의 관법(觀法)인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을 의미한다. 삼성원융관이란 비로자나불과 보현․문수 두 보살의 삼성(三聖)이 서로 융합하여 일체가 되어 거리낌이 없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심과 불과 중생이라고 하는 삼법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아야 할 이(理)도, 증득해야 할 지혜도, 마음을 여윈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연각(緣覺), 성문(聖聞)의 삼승(三乘) 역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할 뿐 본래의 차별이 없으므로 그 불성을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실천으로 보여준 체험종교의 필요성과 중요함이 도출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의상의 체험종교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낙산사의 기도객들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고, 많은 영험담으로 확인할 수 있음이다.

불교사의 두 기둥 원효와 의상

  원효와 의상은 당대에 있어 불교의 흐름을 이끌어 나간 선각자들이다. 그들 둘은 일찍이 함께 도당유학의 길에 올랐었다.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신 일화로 유명한 원효가 당으로의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선 길을 의상은 초지일관 구법의 먼 길을 떠났다. 여기서부터 이들 둘은 외형상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해 불교를 천착해 들어갔고, 그 깨우침을 대중에 포교하는 데 있어서도 각각 맡은 분야를 달리하는 역할 분담을 보였다. 원효와 의상을 비교 평가하여 우열을 가리려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무의미해져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당시 신라의 불교를 발전시키고 대중에게 전파해 나가는데 있어 각자의 개성에 맞게 다른 방법과 영역을 맡아 역할 분담을 했던 것이다. 의상이 관세음보살로 인한 현세 구복의 의지를 보여주었다면 원효는 아미타불을 원불(願佛)로 하여 미래의 극락정토에 대한 염원을 펴 보였던 것이다.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인 아미타불의 왼쪽에는 항상 관음보살이 보좌하고 있듯 이들 둘의 신앙은 이런 관계 속에서 연관지어져 있었다. 의상이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창건한 낙산사 근처에 영혈사(靈穴寺)가 원효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하나 낙산사의 창건 이후 원효가 이 곳을 담례(膽禮)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적혀있다. 원효법사가 낙산사를 예배하려고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논 가운데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니 그 여인은 벼가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다 다리 밑에 이르러 속옷을 빨고 있는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자 그 여인은 빨래를 빨던 더러운 물을 떠받쳤다.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고, 이때 물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제호(불상을 비유한 말) 스님은 가지 마십시오” 하고는 숨어버렸다.

돌아보니 그 여인은 사라져 없어지고 신발 한짝이 벗어져있었다. 드디어 원효가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나머지 한짝이 놓여진 것을 보고 그제야 전에 만났던 성녀(聖女)가 관음의 신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의상이 마련한 관음도량을 원효가 확인하고 그곳이 진신(眞身)의 주처임을 증명한 것이다.
 
 원효와 의상은 이외에도 참으로 재미있는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3천이 넘는 제자를 두었던 의상에 비해 원효는 단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았다. 또 원효가 왕성한 저술활동을 통해 방대한 책을 남긴 것에 비해 의상의 저술활동은 미비했고 다만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가 전해져 의상의 화엄세계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현세구복의 관음신앙

  의상 이전부터도 관음신앙은 신라 땅에 상당히 넓게 유포되어 있었다.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고 치성으로 빌어서 낳은 자장율사의 얘기며, 이후에 경덕왕 때 분황사의 천수관음에게 빌어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 중국에 갇힌 김인문(金仁門)을 위하여 인용사(仁容寺)에 관음도량을 열었다는 것, 중생사의 대비상이 젖을 먹여가며 아이를 키워 재상이 된 얘기 등은 모두 대표적인 관음신앙의 일화들이다.

의상은 신라땅에 관음의 도량을 설정하고 이 땅에 이러한 관음신앙을 정착시킨 인물인 것이다. 관음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신라인의 믿음은 현실구복에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관음보살은 극락정토의 비젼을 제시하는 아미타불과는 달리 사바세계에 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당면과제를 해결해줄 현세 이익적인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사로운 소원과 염원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신라인의 대원이었던 삼국통일을 관음신앙의 원력에 의지했던 것이다.

의상에 의해 꽃다운 관세음보살에 대한 현세구복적 신앙은 당시 신라내의 상황에 부응한 만족감에 그치지 않고 현재 한민족의 당면과제인 남북통일의 염원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염원의 가시적 실천의지는 현재 보타전 건립에 따른 일천관음봉안불사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위도상 38선을 상회하는 지역을 점유한 낙산사에서 남북통일의 염원을 기원하는 일은 분단의 현실을 가슴 속 저 끝에서부터 절절히 저려오는 아픔으로 응어리져 있는 것이다. “사바세계에서 중생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현세구원의 염원을 담고 계신 관음보살이 이 곳에 이렇게 상주하고 계시다는 믿음은 곧 통일로 이어질 것이다. 외세에 의해 한 핏줄이 갈라져 있는 이 가슴 아픈 현실을 관세음보살님이 외면할 리 없는 일이지요” 일천관음 봉안불사를 추진중에 있는 주지 보산(寶山)스님의 말씀이다.

의상대사가 처음 낙산사를 창건할 때 매양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입정에 들었었다. 그 곳에는 지금 의상대(義湘臺)가 그 자취를 확인해 주고 있고, 왼쪽으로 홍련암의 날렵한 모습이 기도객을 빨아들이듯 이끌고 있다. 마루에 난 구멍을 통해 출렁이는 파도가 보이고 그 구멍으로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은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해수관음의 자비로운 위용 못지않게 넓은 가슴을 열어놓은 연못 위에 하얀 연꽃이 일천관음의 화신인 양 얼굴을 내밀었다. 그 곳에 보타전이 완공되는 날 일천관음은 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조국통일의 염원을 듣게 될 것이다.

 
소백산 구인사

풍수지리상의 구인사

태백산맥에서 갈리어 서쪽으로 달리다가 서남방향으로 뻗어내려 충정과 영․호남지방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 중심부에 구봉팔문(九峰八門)의 웅대기묘한 산세가 있어 신비의 극치를 이루며 이 나라 최고 오지로서의 때묻지 않은 처녀지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곳이 행정구역상으로는 한국 유일의 바다가 없는 충청북도. 그중에서도 고산과 심곡으로 물이 좋아 단양팔경하면 삼척동자라도 구경하고파 하는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이 곳에 의연하게 만중생의 구제를 기약하며 뿌리내린 구인사(救仁寺)가 매일 3천여 종도를 맞으며 구세제민을 부족함 없이 연중무휴로 치러 내는 것이다.

소백산맥 중 중심을 이루는 제 4봉에서 연맥(連脈)이 되어 수리봉을 중앙으로 하여 우로 칠봉 좌로 삼봉의 날개가 닭이 알을 품은 포란형국(抱卵形局)으로서 연화지(連花地)를 이루고 있음에 고래로부터 대승지로 알려져 서기(瑞氣)가 일고 있음은 이미 이 나라 풍수지리학의 대가들로부터 구전되어 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명승지에 지난 1945년 음력 5월 5일에 천태종의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께서 구인사를 창건, 초암을 이루니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그 후 6․25전란으로 소실된 초암을 52년 12월에 재건하고 64년 3월에는 인광당(仁光堂) 및 보타전을 건축하니 초가집을 탈피하고 처음으로 목조, 함석 5칸과 8칸의 보타전이 문을 열어 여법한 부처님의 도량으로 대승구제의 터전을 마련케 되었다.

천태종의 중창

  중국의 천태지자대사가 창시하고 고려시대에 대각국사인 의천에 의해 국내에 뿌리를 내렸던 천태종은 조선시대의 국책이었던 억불숭유정책에 몰려 퇴조를 거듭하여 급기야는 민간신앙으로 그 명맥만을 유지하기에 이른다.

조계종과 태고종이 불교중흥의 기치를 듬과 함께 종단의 골격을 튼튼히 하는 동안에도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왜정 36년을 맞음에 그 명맥은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을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가 중창에 큰 원을 세우니 천태종과 함께 이 나라 불교의 아침이 오게 된 것이다.

상월조사는 1911년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 봉촌마을에서 밀양 박씨인 명진씨의 2대 독자로 태어나 속명을 준동(俊童)이라고 했으며 5세에 서당에 들어가 유학과 한학을 익혔는데 13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완독하였다.

1915년 15세의 나이로 불문에 들어선 조사는 명산의 대찰을 두루 전전하며 수행정진하다가 1917년 중국으로 건너가 보타산, 청량산, 아미산 등 명산을 돌며 납자로서의 유학생활에 정진하였다. 상월대조사가 불법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귀국한 것은 1944년으로 해방을 예견한 수행자의 안목이었으며, 1945년 해방 직전에 음력 5월5일 지금의 대가람 구인사 자리에 삼칸 초목을 짓고 도량창건에 들어간 것이다.

서기 1967년 1월 24일 천태종의 법맥을 여법하게 계승 발전할 것을 삼보전에 서원을 세우고 구인사를 총본산으로 정하고 대한불교 천태종을 정부에 등록, 초대 종정에 취임하니 이 나라 불교의 백년대계와 개인완성, 불국토건설, 법성체결합(法成體結合) 등 종단 삼대강령을 사자후하여 분연히 불국토의 실현을 기별하였던 것이다.

이후로 깍아지른듯한 비녕에 주변 2백 50ha를 마련,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하는 수행으로 선농일체를 몸소 모법으로 보여 2백만 그루의 고급 수목을 심어 녹색의 활기찬 생명력을 소백산 일원에 전파하니 공중의 중생(鳥類), 지하의 중생(지옥중생), 지상의 중생( 人), 수중의 중생(魚類)등 사계의 ant 중생이 해탈을 얻는 영지(靈地)로 삼게 되었다.
 
 상월대조사께서는 74년 4월27일 법통의 수제자이며 현 종정이신 남대충(南大忠) 대종사에게 전하고 세수 64세와 법랍 5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이미 이 당시에 전국에 걸쳐 1백5개의 말사와 3백여명의 수행납자를 거느려 국내 굴지의 종단으로 자리하니 신도는 60만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어서 남대충(南大忠) 종정께서 종풍을 쇄신하고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도제양성과 종단의 삼대지표인 ‘애국불교를 건립한다. 생활불교를 지향한다. 대중불교를 구현한다.’는 확고한 신념 아래 일심욕견불(一心欲見佛)하고 불자석신명(不自惜身命)하는 수행을 관철하여 일사분란한 종단 운영을 펴니 신심즉 생활이고 생활즉 신심이라는 평범한 진리로 공덕을 체험하는 종도가 부지기수인 것이다.

서기 1976년에 향적당을 건립하고 다음해에 천태종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를 건립 후 매년 일주문과 운강당(강원), 도솔암, 광도실 등을 건립, 종력의 집대성을 점진하다가 법당으로서는 국내 최대규모인 대법당 설법보전을 5층 건물에 연건평 8백86평(높이 32m)을 80년 4월 29일에 낙성하니 1945년도에 3칸 초암으로 시작했던 자리가 35년만의 일약 대법당으로 부처님을 시봉하니 그 교세는 필설(茟)로 기록치 않아도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종단의 면모

  대승경전인 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여 관세음보살을 주창하여 기도에 몰입하고 있는 신도들이 염하(炎夏)나 엄동을 막론하고 매일 3천에 이르니 전국의 대소 사찰중에서 가장 많은 신도가 왕래하게 되며 따라서 1일 1만기에 달하는 식사를 준비, 나누게 되므로 그 규모는 가히 보지 않고는 짐작이 어려운 지경이다.

경내의 부속 요사로는 종각, 천왕문(청동 사천왕 상 봉안), 총무원 청사, 삼도굴(三度窟), 관음전, 도향당(度香堂), 인광당(仁光堂), 영광당, 문도실, 장문실(長文室), 삼보당(三寶堂) 등 그 이름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전각들이 물경 50여채에 이르니 넓은 광할지도 아니요 평평한 대지도 아닌 심산 협곡의 양편에 계곡을 길로 하고 깍아지른 듯한 비녕을 대지로 하여 층계를 방불케 하며 건림(建林)이 들어 찼으니 과연 대가람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연중무휴로 기도를 드리고자 하는 신도의 숫자가 많다보니 그 수를 매일 3천 X 3백65일 기산(起算)한다면 1백9만5천에 이르는데 실지로 크고 작은 기도일 행사일 등의 인원을 합하면 2백만명이 훨씬 넘게 도래하므로 이들이 먹어대는 장(醬) 또한 천문학적인 물량이어서 1년에 대두 10말짜리 콩 2백가마의 메주를 직접 쑤어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담아놓은 장독이 물경 2백50여 항아리에 달하니 그것을 먹어대는 인원이 문제가 아니라 그 그릇들을 관리하는 인원도 또한 무시하지 못하리 만큼 큰 인원이다. 그로인해 이 구인사를 찾는 관광객은 여느 사찰에서 보는 요사채가 범종각, 부처님을 대하면 별감각없이 평상심에 머물지만 장독대를 오르는 순간 경이의 감탄사가 연발되어 함께 온 관광객이 연신 카메라를 터뜨리기에 여념이 없다.

구인사 5층 대법당인 설법보전에 모셔놓은 삼존불은 가운데 모신 부처님은 현세불인 석가여래이며 그 왼쪽에는 관세음보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여 색상장엄을 이루었는데 이 삼존불의 특색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불상뒤에 빗살무늬의 광배를 두고 있으며 보통사람 두배 가량의 거대불상으로 무릎까지만 해도 1m 되는 대불상이다.
 
 여기에 모셔진 부처님들의 모습은 삼계중생의 모든 고통을 어루만져주며 자비로서 인간의 마음을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이 도량을 찾는 일체 중생을 이고득락케하며 자연히 존경심이 일게 되어 있다. 또한 5층 대법당 앞에 세워진 삼층사리석탑은 동물 중에서 가장 힘이 세고 영리한 코끼리(부처님의 법을 상징함) 세 마리가 이 탑을 업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사리탑 정상에는 금강불괴(金剛不壞)를 뜻하는 천태종의 마크가 선연하여 종력 창달에 혁연한 기치를 대할 수 있다.

관음전에 모셔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후불탱화로 하여 관세음보살님의 반가상이 모셔져 있는데 한량없는 자비로서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은 관음염불을 주된 수행으로 삼고있는 천태종에서는 더욱 중생과 친화감을 나타내어 대비관음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구인사 중심부에 설법보전과 함께 이 관음전은 종단 주요 불교의식을 봉행하는 곳이며 그 맨 왼쪽에는 스님들의 공양 처소로 도향당(度香堂)이 자리하여 푸른 송림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 한 폭의 불화(佛畵) 속에 현실극락을 맛보게 한다.

범종각에 자리한 사물 중 범종만을 소개하면 삼계의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법구이며 특히 지옥중생을 구제하는데 주로 쓰이고 있다. 이 범종은 애국불교를 3대 지표 중의 하나로 삼는 본 종단에서 호국안민을 기원하기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타종하고 있는데 이 종은 경주 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일명:에밀레종)의 모형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서 하늘에서 꽃구름을 타고 선녀가 하강하는 비천상과 각종 천계의 문양이 이채를 이룬다. 이 범종은 일본인 불자가 시주한 것으로 청동 1천관의 무게로써 그 장중함은 소백준령을 올리며 국태민안을 삼세시방에 광휘하고 있다.

이 구인사를 중심도량으로 하여 말사 및 사설 말사가 1백50여개에 달하고 신도회관이 1백 40여개 (지부9, 지회1백3, 독립분회27개, 기타)이며 승려수가 비구, 비구니를 합하여 3백70여명에 달하고 신도수가 정확히 1백31만4천9백28명(남자:42만4백80명, 여자:89만4천4백48명)으로 승속의 관리 및 단련에 철저를 기하고 있다.

교리 및 정근

  본 천태종은 부처님께서 오시(五時)의 마지막에 설하신 법화열반시의 경전인 묘법연화경을 주된 소의경전으로 하여 이 경의 방편품에 설하신 ‘불타의 교훈으로 최후 목적은 이승, 또는 삼승이 아니라 일승묘법(一乘妙法)으로서 성불하는 것’이라고 밝힌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진리와 우주 현상계의 만물과 진리의 실상이 공(空)․가(假)․중(中) 삼제(三諦)가 하나로 되어있다는 삼제원융과일체세간의 사사물물이 호구호융(互具互融)함을 철저히 밝힌 것으로 불타의 많은 설법이 색법(色法)보다 심법(心法)을 중요시한 경향이 있는데 천태학만은 물질도 마음못지않게 우주삼계의 근본으로 생각하여 우주인생에 활발한 생명을 소생시켜줌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진리를 증명하는 방법으로는 한 마음 위에 견사(見思), 진사(塵思), 무명(無明) 등 세가지 혹을 끊어 공기중 삼제(三諦)를 관찰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이 있으며 여기에서 삼지(三智), 즉 도종지(道種智), 일체지(一切智), 일체종지(一切種智)와 삼덕(三德)인 법신덕(法身德), 반야덕(般若德), 해탈덕(解脫德)을 성취하여 대각을 얻어 불타 자리에 이르러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참배코스 및 결어

  일승묘법(一乘妙法)의 천태 근본 교지에 의하고 고려 대각국사의 개종정신(開宗精神)에 의거하여 불교의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고자 새로운 종단이 오늘의 천태종이라면 구인사는 현세에 천대종의 발상지로서 종도의 근본 신행 도량인 바 이를 천태종 총본산이라 하며 이로써 오늘의 천태종은 여러 종파 중에서 유일하게 일종성립의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갖추게 되어 무한한 발전을 기약하고 있다.

종단 산하기관으로 금강불교대학과 본대학 부산분교, 종보사(宗報社), 금강잡지사(金剛雜誌社) 등이 있어 불교대학 및 종보와 월간지를 발행하여 사회사업기관으로는 부산 광명사 유치원, 대구 동해유치원, 원주 성무유치원, 마산 유성유치원 등이 있어 후진양성에 초미의 관심으로 종력을 경주하고 있다.
 
 부산에는 초읍에 삼광사(주지:춘광스님)가 있어 종도의 결속과 광성유포 및 관음 기도에 타지역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신행을 하고 있으며 또한 1만종도가 함께 법회를 치룰 수 있는 지관전(止觀殿)은 국내 유일의 불교 명물로 자랑스럽다.
 
 이 천태종이 구인사를 정점으로 하여 국내 최대 규모의 장엄무비한 대가람으로 발전하고 관음영장으로서 불광을 두루 비추고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말사와 회관을 계속 건립해감에 천태종의 면모를 날로 빛내고 있으니 실로 우리 불교계의 희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서울에서 교통편은 마장동 터미널에서 정기고속버스가 매일 수회씩 구인사까지 직행하고 있으며, 부산에서는 삼광사에서 수시로 직행버스가 다니고 또한 부산 동부터미널에서 매일 오전 8시 10분을 첫차로 하여 3회의 운행 버스편이 있다. 대구를 거쳐 안동과 영주, 단양을 연결하는 주위 경관이 사철을 통하여 이 나라 금수강산을 대표하는 듯 하므로 기도(참배)는 물론 여행감에도 작은 육신을 사로잡는데 남음이 없으리라.

 
태화산 마곡사

태화산의 명당지

  훈풍과 함께 여린 나뭇잎새가 바람결에 나부끼며 초여름을 알리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나뭇잎은 짙푸른 두터운 녹엽으로 바뀌었고 바람은 한 점 없이 눅눅한 공기만 흐르는 성하가 되었다. 무더운 시간을 피하여 태화산을 볼 생각으로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결과는 한낮에야 마곡에 닿게 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공주행을 타고, 한참 도시 모양을 새롭게 추스르고 있는 공주시 외각에 닿기는 12시.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태화산 마곡사에 당도하기는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였다. 무려 5시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산구(山口)에 들어서고 보니 사람의 물결은 도심과 다를게 없었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밥집을 찾아들어 산채 비빔밥을 주문하고, 창밖으로 눈길을 주니 하동들이 쪽빛 청수가 넘실거리는 조그만 소(沼)에서 물장구를 치며 물놀이에 정신이 없다.
 
 푸른 숲이 뒤에 병풍처럼 둘러있어서인지, 계곡을 흐르는 물은 그야말로 쪽빛의 녹수였다. 차령산맥의 한 지맥으로 천안지방의 경덕산(慶德山)으로부터 길게 뻗어내려온 오지답다는 느낌이 그 물빛에서 더욱 역력하게 들었다. 극성스러운 사람들의 손길과 숨결에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엇이 모두가 무너져나가고 있는 판국에도, 이처럼 고운 물빛을 지닌 고장이 우리의 산하에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이 대견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늦게 때우고 푸른 물길을 따라 들어가니 참으로 경승(景勝)이랄 수밖에 없는 물과 숲이 그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맑고 푸른 물 속은 어항을 들여다 보듯이 속속들이 모두 내다보였으며, 물길을 따라 유유히 미끄러지듯 유영을 즐기는 물고기 떼들은 손상되지 않은 원형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곁을 지나는 사람들도 보이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영탄을 금치 못했다.
 
 산세가 장려하거나 그렇게 고산(高山)은 아님에도 깊고 깊은 오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길게 뻗어내려온 무성산(武城山)에 있다. 그것은 마곡사의 배산이 해발 614m에 지나지 않은 점으로 더욱 확실해진다. 남쪽으로 흐르던 물길은 동쪽으로 휘어져서 이내 서쪽으로 거슬러 오르고, 물길이 흐르면서 이루어낸 분지와 같은 평탄지에는 천년의 수림과 어우러진 가람이 웅자를 드러냈다.

대가람의 현장

  마곡사(摩谷寺)는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567번지 태화산 동쪽 기슭에 앉아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지금의 공주시에서 약 24km 상거한 곳에 있다. 비기(秘記)에 의하면 이름 높은 명당으로서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산곡을 흘러온 시냇물이 산의 표고에 비해 수량이 많으며, 물의 흐름새가 태극형 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승지임을 실감나게 한다.
 
산지에 자리 잡은 가람이지만 표고가 150m 밖에 되지 않은 산암내의 평지인데다가 산곡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서쪽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흘러와서는 가람이 잇는 곳을 휘어감고 돌아 다시 남쪽으로 빠지고 있으며, 약간 높은 안산(案山)이 배산(背山)을 들여다 볼 수 없이 막고 있어서 다시 없는 길지(吉地)에 마곡(摩谷)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곳의 오른편에는 군왕대와 왼편의 구릉이 막고 있고, 도량의 북서쪽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 진입로가 트여 있다. 온양에서 16km, 공주에서 24km, 그리고 사곡(寺谷)에서는 8km 상거한 곳인데, 교통이 불편하여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같은 본사급인 수덕사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귀가 빠지는 구면을 보였으나 지금은 공주에서 시내버스가 40분마다 드나들 정도로 교통이 좋아졌다.
 
가람이 앉아 있는 지대는 동서가 250m, 남북이 400m로, 8천여평에 가까운 분지이며, 기이한 것은 흘러온 물길이 동서로 한 중앙을 관류하여 사역(寺域)의 부지를 남북으로 갈라 놓고 있는 점이다.
 
중앙을 흐르는 계류(溪流)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에 대웅보전과 대광보전, 5층석탑 등이 정남향으로 앉아 있고 전각과 탑을 꿰뚫는 중심선상에서 동편으로 심검당을 비롯한 요사가 있으며, 서편으로는 응진전과 종무소 건물이 위치해 있다. 중심을 흐르는 계류에는 그림같은 다리가 걸려 있으며, 시내를 건넌 남쪽에는 해탈문과 천왕문이 있고, 천왕문 서편으로 약간 돋우어진 지대에 영산전과 홍성루, 매회당, 수선사 등 요사가 있다. 명부전 뒤편 등성이에 국사당이 있다. 큰 절 뜰에서 보면 계류 건너에 있는 원당이나 요사는 일군의 별원(別院)같은 느낌을 준다.
 
마곡사 건물배치는 여느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마곡사의 연혁을 보면 30여동의 당우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각들로 가득했을 터전은 이제는 드넓은 뜨락으로만 남아 있다. 번성을 이루었던 당시의 가람배치와도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같은 가람배치가 임진왜란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해 본다.
 
마곡사는 산내 암자로는 영은암, 은적암, 대원암, 백련암, 청련암, 토굴암, 부옹암, 북가섭암 등이 있다.  이 골짜기에 들어오는 길은 서북에서 유구(維鳩)를 향하여 오다가 호계(虎溪)에서 들어오는 길과 온양에서 유구읍을 경유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오는 길이 있다.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가 쓴 기록을 보면 ‘절은 고개마루 아래에 있었으며 십여리 길가에 푸른 냇물과 흰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고 되어 있다. 마곡사의 사지(寺地) 일대를 휘감고 흐르는 냇물과 주변의 산에 울창한 수림, 그리고 여기 저기에서 꽃 피어난 산 벚나무와 녹음이 선경을 이루고 있음을 지적함일 것이다.

마곡사의 개창과 특수성

  마곡사는 선덕여왕 9년(640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국내에 7대 사찰을 지을 때 통도사, 월정사와 함게 창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년대가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통일신라 문성왕 때 보조선사가 개창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서 중건되었다는 설을 중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태화산 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 摩谷寺事蹟立案)」에 보면 당나라 정관(貞觀) 17년 자장율사가 당에 수학하고 돌아와 여러 곳에 불법을 홍포하고자 할 때 창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절 이름을 마곡사라고 한 것도 보철화상(寶徹和尙)이 전도득법(傳道得法)한 후에 그의 율(律)을 배우고자 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삼대와 같이 이 골짜기를 빽빽하게 메웠는데, 그 사람들의 모습이 마(摩)와 같았다고 하여 마곡사라고 했다고 것이다.
 
「연기약초(緣起略抄)」에는 신라 문성왕 2년 보조국사 체징(體澄)이 당나라에 건너가 선지식을 두루 돌아보고 귀국하여 교화사업에 힘을 쏟던 그 해에 이 절을 개산했고, 또 사명도 보조선사가 당에서 애법(愛法)한 보철선사의 호가 마곡인데 그의 법연(法緣)을 기리고자 마곡사라 했다는 것이다.
 
「사적입안(事蹟立案)」의 자장 청건설의 시기는 삼국이 통일되기 이전에 신라와 백제가 국경분쟁이 빈번하던 시기인 반면에 643년, 자장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통도사와 오대산의 적멸보궁과 월정사를 창건할 시기이다.
 
「연기약초(緣起略抄)의 보조선사는 본래 태진(態津, 지금의 공주읍) 출신으로 후일에 가지산 보림사를 중창하여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맥(迦智山脈)의 개조(開祖)가 된 승려이다.
 
이후 신라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가 당우를 확장했고 헌강왕 3년(877)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여 도량을 일신했다고 한다. 그 후 나말(羅末)과 여초(麗初)의 수십년간 다시 티락하였다 한다. 고려에 들어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를 맞이하여 패찰을 중수하고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불사를 진행했다.
 
그 당시에는 많은 무리의 도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헌종(1465~1487)년간에 세조가 이 곳에 들려 영산전의 액호를 써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맞아 전국이 초토화되고 많은 사찰들이 불에 타 그 흔적마저 사라진 당시에 비추어 보면, 확실한 기록이 보존될 까닭이 없다.
 
양대 병란 후로 60여년간 도량은 황폐해졌고, 1650년에 공주 목사로 부임한 감사 이태연(李泰淵)에 의해 자신의 월봉을 모아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에서야 승려들이 모여 절의 모습을 일으키고자 애를 썼다고 한다. 이 때에 불사에 주력한 승려가 각순지원(覺淳智元) 등이며 마곡사의 중흥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782년, 마곡사에 큰 불이 일어나 대법당을 위시하여 5백여칸의 대소 건물이 불탔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대광보전, 영산전, 흥성루, 심검당, 해탈문 등은 건륭(乾隆, 1736~1795), 가경(嘉慶, 1796~1820), 도광(道光, 1821~1850), 함례(咸禮, 1851~861)년간에 중수되었거나 개수된 건물이다.
 
  국사당에는 개창주 자장을 위시하여 불일 보조국사, 범일, 도선국사 등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영자전(影子殿)에는 지눌(智訥)을 비롯하여 휴정태능(休靜太能), 가휘(可煇), 각순(覺淳)등 마곡사에 주석했거나 중창을 담당했던 고승들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들면서 불교는 더욱 쇠퇴해지고, 일제침략기간 중 어려워진 사원경제로 인하여 주거하는 승려 수도 줄고 건물도 퇴락하여 지금의 도량에는 19동의 전각이 남아 있다. 그런데다 최근에 이 곳을 지키는 승려들이 중창에 손을 쓰지 않아 더욱 황폐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마곡사는 자장이 창건했고 보희선사가 다시 조성했으며 범일이 3차로 건립에 힘을 썼고, 도선이 조성했으며 각순과 여러 승려들이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고려시대의 지눌의 중창 사실을 빼놓음이 의아스럽다.
 
 최근 백범 김구선생이 명성황후 시해범인 중 한 사람인 쯔찌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갇혔다가 1898년 탈옥하여 마곡사에 들어와 은신하기도 하였다. 마곡사의 뜰에는 김구 주석을 기리는 비가 서 있고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도 있다.
 
지난해 마곡사 주지로 부임한 능엄스님은 33여억원이 소요되는 마곡사 중창불사 계획을 세우고 심검당, 요사채, 강당, 종루, 누각, 교량 등을 신축하고자 진력하고 있다.
 
전국 25개 교구본사 중에서 가장 퇴락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마곡사. 전임자들이야 그들대로 고충이 있어서 이와 같은 모습으로 지내왔겠지만, 대웅보전에 깔린 자리가 썩고 닳아서 흩어지고, 심검당은 손만 대면 주저앉을 것 같은 퇴락한 모습을 볼 때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새로 부임한 능엄스님이 벌써 몇몇 전각의 기둥을 갈고 번와를 하고 용마루를 바꾸어 뒤늦게나마 일신하려는 불사를 일으킴은 마곡사로 해서는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연산 보경사

12폭포 속 보경사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다. 산수를 즐길 줄 알면 지자도 될 수 있고 인자도 될 수 있단 얘기다. 지혜와 덕을 갖춘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높은 경지이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산수를 즐겨 찾고 가까이함으로 해서 그 모습과 성품을 닮아가려 했다.
 
경북 포항시에서 동해남부선 국도를 따라 북으로 70여리 올라가면 고찰 해동 보경사(寶鏡寺)가 12폭포의 장관 속에 포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속에서 지혜와 덕망을 갖추고자 하는 인간의 여망과 노력은 오랜 세월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다.
 
 6월의 태양이 뿜어내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인해 눈부신 가로수가 동해 국도변에 도열해 있고 그 속을 지나 도착한 보경사의 매표소 앞 일주문은 여느 고찰과는 다른 시골집 싸리문을 기억나게 한다.
 
웅려(雄麗)한 종남산(終南山)을 등에 업고 좌우로 빼어난 내연산 연봉(內延山 連峰)에 둘러싸여 12폭포의 맑은 물을 쏟아내리는 계곡 속에 자리한 보경사는 그윽한 계곡만큼 오랜 세월을 지내오며 수많은 얘깃거리를 남겨 놓았다.
 
 이 절의 주봉(主峰)을 종남산이라 함은 중국 성서성 장안의 안산(案山)인 종남산과 같다는 고전에 의한 것이며 여지승람(與知勝覽)에는 내영산(內迎山)이라 하였는데 이조말에 내연산(內延山)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 산의 정상에는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사람의 손가락으로는 움직이나 양손으로는 움직여지지 않는 기암(奇岩)이라고 한다.

8면보경을 묻다

  보경사의 연기설화에 의하면 신라 제26대 진평왕 25년(서기 602년)에 일찍이 진(陳)나라에 들어가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명법사가 왕께 아뢰기를 “동해안 영산에서 명당을 찾아 소승이 진나라에서 유학시 한 도인에게 전수한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동해로 침입을 하는 왜구를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게 될 것입니다”하고는 이 곳 내연산 아래 못을 메우고 팔면경을 그 속에 묻고 금당을 세워 창건하고 보경사라 칭했다.
 
도인으로부터 비전한 팔만보경이란 보경사 금당탑기에 의하면, 한(漢) 영평 10년에 서역의 범승인 마등과 법안 두 스님이 불경과 불상을 받들고 중국에 올 적에 12면원경(十二面圓鏡)과 8면원경(八面圓鏡)을 가지고 왔다.
 
12면경은 중국 낙양옹문(洛陽雍門) 밖에 묻고 절을 세우니 그때 백마에 경과 거울을 싣고 왔다 하여 백마사라 칭하고 팔면경은 두 법사의 제자 일조(日照)에게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동쪽나라 조선 해 뜨는 곳에 종남산이 있으며 그 산 아래 백 척 깊은 못이 있으니 그 곳은 동국의 명당이다. 그 못을 메우고 그 속에 이 거울을 묻고 법당을 세우면 만세천하에 무너지지 않는 곳이다”라 전하고 일조법사로부터 5백년을 비전(秘傳)되어 오다가 신라의 지명법사(智明法師)에게 불법과 아울러 전하여졌다.
 
  이 일로 해서 우리 8역(域=道) 가문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한다. 또한 금당 앞 5층탑을 신라 제33대 성덕왕 22년 도인 각인(覺仁)과 문원(文遠)이 서로 의논하여 절이 있는데 탑이 없을 수 없
다 하고 발원하여 시추를 얻어 세웠다 한다.
 
그 후 신라 제35대 경덕왕 4년에 철민화상에 의해 한 차례의 중창이 있었고 고려 제23대 고종 원년에 대선사 승형 곧 원진국사(圓眞國師)로 하여금 보경사에 주지일을 맡게 했으며, 그 때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보고 승방 4동과 정문 1칸 등을 일시 중창하고 종․경․법고 등의 도구도 완비하였다.
 
원진국사 이래로 계속하여 퇴락과 중창․중수를 거듭해오다 최근의 보경사 모습을 갖추게 된 때는 1977년 채벽암화상에 의해서이다. 벽암스님은 부임한 이듬해에 퇴락한 적광전(寂光殿) 삼존불상의 금의(金衣)를 일신 개금불사를 하고, 조사전 앞에 보물 제252호의 원진국사비가 천년 세월 풍상에 시달려 마모되고 퇴락한 것을 도 및 군에서 보조비를 받아 비각 2칸을 건립하는 등 보
수와 사천왕상조성의 불사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람의 향기

  보경사에는 적광전 대웅전을 위시하여 14동의 건물이 있다. 적광전은 불교에서 최고의 이상을 표시한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보처에 문수, 보현보살을 모셔 삼존불을 봉안한 성전이다.
 
 이렇듯 삼존불을 모시는 것은 대개 화엄종에 속해있던 사찰을 의미한다.  금당기(金堂記)에 ‘남악문인 철민이 보경사를 중창하였다’고 한 것의 남악은 의상대사의 화엄종이 신라말기에 남악․북악 두 파로 갈리었는데 그 남악을 가리킨 것으로 볼 때 또한 그러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도 해월(海月)․계영(桂影)․오어암(敖魚岩)․동봉(東峰) 등 큰 강사가 배출되어 경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적광선 뒤편으로는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화엄종에서는 비로전을 모시면 대웅전을 따로이 모시지 않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종파가 한데 통합되자 비로전․대웅전․영산전․나한전 등을 종합하여 봉안하게 되었다.
 
 현존의 이 법당은 숙종 3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 매우 장중하고 간결한 조선 중엽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고 그 외 영상전과 팔상전, 원진전 등의 건물이 있다.  고려중엽 불교계의 거성이며 보경사의 중창조로서 그 높은 선풍을 드날리고 도덕이 당시의 사표가 된 원진국사의 비가 대웅전 후원 영산전 앞에 보물 제252호로 지정되어 엄연한 모습으로 서있다. 이 비는 고려 통의대부 추밀원 부승선 이공로가 그 글을 찬했다.
 
 비둔에 의하면 국사의 속성은 신씨(申氏)이며 이름은 숭형, 자는 영회로 상락군 산양현 사람으로 고려 제19대 명종원년에 탄생되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전승해 왔으며 세살 때 고아가 된 승형은 숙부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국사가 일곱 살되던 해 청도 운문사의 연실선사에게 위탁되어 글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 남다른 총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출가를 한 것은 13세가 되던 해 희양산 봉악사에서다. 스님의 도행은 일찍이 그 명망을 드날렸다.
 
스님이 27세 되던 해 보제선사의 담선법회(선승들의 참선공부를 시험보는 법회)에 나아가던 중 스승의 부음을 듣고 가던 길을 되돌아 스승의 장례를 치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종은 평소 형승 스님의 도행을 흠모해 오던 터라 선․교종의 감독기관인 우승록사를 불러 “형승스님을 합격자로 등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교를 내릴 정도였다.
 
 그 해 가을 개경 광명사에서 벌어진 선불장에 나아가 장원으로 발탁된 스님은 이 일이 오히려 수행함에 있어 커다란 장애라 여기고 걸망을 짊어지고 운수납자의 길을 떠났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조계산 송강사의 방장으로 있던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승형스님은 지눌스님을 참견하고 ‘법(法)과 색(色)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걸 깨닫고 지눌의 문하가 되어 조계선풍의 후손이 된다. 그리고 명산고찰을 순례하며 수도에 힘쓰던 중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이 곳 보경사의 소임을 맡았다.
 
이규보의 이상국집에 보면, 국사가 보경사에 계실 때 고증왕이 왕사로 봉하려 대신을 보내는 등 간청을 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표문을 다섯 번이나 올렸다. 또한 수 백명의 도둑이 운문사를 점거하고 있을 때 단신으로 법회를 열어 「육조단경」으로 그들을 교화시켰으며 청도 칠장사에서 가뭄으로 모든 우물이 고갈 되었을 때 자각(慈覺)선사의 법문으로 해갈시키고 팔공산 염불암에서 선정으로 가뭄을 풀었다고 한다. 이렇듯 도력과 덕행이 높은 승형스님은 고종 8년 염불암에서 입적하였는데, 고종은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하고 국사의 칭호를 내렸다.
 
 이외에도 보경사에는 원각조사와 오암대사 등 많은 스님들이 수도처로 머물렀다. 그 중 오암스님은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보경사에서 머리를 깎은 오암스님은 계영강백에게 구족계를 받아 서산대사의 9세손이 되었다. 스님은 대단히 총명하고 글공부하는데 있어 재주가 남달라 당시 억불숭유로 인해 승려를 하대시하는 유생들을 글로써 설복시킨 일이 여러차례나 있어 그의 도덕과 교화가 경상좌도 일대를 풍미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8면보경의 창건비화와 더불은 원진국사와 원각조사 오암스님의 이야기는 보경사의 그윽한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새로운 도약

  내연산 계곡의 길이는 무려 30리나 된다. 그 계곡을 타고 오르면 오를 수록 그윽함이 더해가고 바위구멍과 반석에서 흘러내려 폭포와 농소를 이룬 절승에다 그 사이 좌우로 치솟은 비하대며 학소대의 기상이 오랜세월을 두고 이 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호흡을 담고 있다. 이런 속에 자리한 보경사의 이끼낀 기와쪽 하나 깨어진 돌탑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얼마간의 정적이 머문 대웅전 뜰에 서서 간간히 들리는 풍경소리며 향내음을 가슴깊이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곳에서 원진국사도 만나고 오암대사의 기지도 배워야 하며 서역에서부터 8면보경을 가져다 이 곳에 묻고 불당을 세운 그 뜻을 새겨보아야 한다.
 
보경사는 근래의 잠시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몇 년을 흘러 보냈다. 이제 새로 부임한 진현스님에 의해 새출발을 다짐하고있다. 진현스님이 이 곳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동안 퇴락된 담장도 쌓고 종무소의 건립도 추진 중이다. 특히 보경사에 보관하고 있는 약 62점의 보물과 유물들을 정리하여 관람할 수 있도록 유물관의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 발길을 돌려 하산하는 길은 또 한번의 해후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는 동해바다의 소금기 섞인 바람이 아득한 옛날로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 뭇사람들의 발길을 잠시 더 잡아둔다.

 
한라산 관음사

  제주도!
  전통적으로 불자의 신심이 강하고 뿌리가 깊은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반도의 불교가 첫 발걸음을 옮겨온 곳이 제주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른바 지금으로부터 2천5백여년전 부처님의 16나한 가운데 여섯 번째 나한인 발다라존자가 제주도에 와서 불법을 처음 전했다는 설이다. 이같은 한국불교의 초전법륜지로 알려진 곳이 한반도 남단 최대의 섬, 제주이다.
 
  열성적인 불자의 섬, 제주도 불교의 총본산은 관음사(觀音寺). 산하에 21개의 말사를 보유하고 있는 조계종 제23교구 본사로 제주 볼교의 산실이자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가 전통적으로 불교의 융성지이자 국내에서도 가장 유서가 깊었던 곳이었다는 증거들은 제주 곳곳의 지명에서도 쉽게 나타나 있다. 우선 현재의 한라산이란 지명은 나한산이었다는 설이 대표적인 예. 부처님의 제자인 「발다라존자」란 아라한이 고대에 첫 발을 제주에 들여 놓은 점을 따서 지금의 한라산, 나한산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사라봉이며, 가실, 오라동, 아라동, 마라도, 가파도, 스모르 등이 현재도 쓰이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붉적 지명이라는 것이다.
 
가싱른 부처님이 설법하신 녹야원이란 뜻이며 오라는 넓은 들, 마라도는 하얀꽃 화한, 가파도는 푸픈연꽃, 스모르는 극락정토를 가리키는 말로써 모두가 불교적 의미와 정신을 담고 있는 지명들이다. 이렇듯 오랜 전통과 역사, 그리고 지명들 속에서 불교와 대단히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제주도 불교는 한반도 남단의 섬이란 특수지형 속에서 자체적인 발달을 해온 것이다.
 
이런 가운데 관음사는 고래로부터 한국불교의 전초기지로서 대내외적인 역할을 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관음사는 1905년 안 봉려관이란 비구니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 안 봉려관 비구니스님은 전라도 남원군 대흥사에서 비구니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관음사를 중창한 안 봉려관은 당초 심신이 두터운 여신도였었다가 불가에 귀의했다.
 
 그러나 전통의 한국불교 초전법륜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제주불교의 중심지 관음사의 역사와 연혁은 육지의 사찰처럼 자세히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선 제주 불교의 독
특한 발전사에서 기인한 때문이다. 제주불교는 육지에서와 같이 본사 중심 또는 공찰 중심으로 발전해 오지는 않았다고 알려진다. 제주도라는 독특한 지형적, 기후적 영향을 받아 애초부터 제주사람들의 토속적 신앙과 병행하면서 발전해 왔다.
 
 따라서 불교는 제주에서 지역민의 정서와 풍습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이른바 민중불교의 요소를 오래전부터 내포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 불교가 관음사라는 조계종 23교구 본사를 중심으로 당초부터 발전했다기 보다는 개별사찰의 각각 활성화된 포교를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관음사가 제주도 안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상징적 기능은 막대하다. 개별 사찰위주의 신행활동이 뿌리조직처럼 뻗어 있으나 이 모든 불교활동을 관음사라는 본사가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음사는 육지 사찰본사와는 또 다른 신앙적 존경과 영역을 갖고 있다. 제주도 내의 주요 사찰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승려들이 관음사에 속해 있었거나 깊은 인연을 맺어오고 잇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제주 관음사의 중창불사는 육지의 타본사에 비해 비교적 척박한 역사를 갖고 있으나 그 이전의 시대를 거슬러 가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시대의 불교탄압 정책으로 인해 가까운 근세사 속에서의 제주 불교 역사가 크게 쇠퇴하긴 했으나 고려시대 불교융성기 등에서 제주불교의 활동성 등은 상당했었다.
 
 역사적 자료 가운데 제주 관음사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12개의 사찰 중 마지막 순서로 나타나 있다. 이와함께 제주 불교의 전통, 역사와 함께 해온 관음사는 또한 불교역사만이 아닌 사회적 상황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증거로서 함께 아픔 및 민족의 애환을 간직해 온다. 이는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인한 불교의 수난 그리고 제주 역사 속의 4․3사건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인해 제주도 내 사찰과 승려들은 이 곳 제주도 사람들의 각 생활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4․3사건의 이후 상황만 보아도 그렇다. 이들 제주도 사람들로서는 거의 대부분이 관련된 민족적 아픔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는 이들의 가족적, 지역적, 민족적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 불교는 관음사를 정점으로 비록 과거 불교의 융성기처럼 번창해 있지는 않지만 주민과 지역사회속에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제주도가 불교 이외의 타종교의 확산을 거의 받아들이고 있는 않은 상황만 보아도 그렇다.
 
제주 관음사는 최근 재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다. 불교계의 원로인 석주스님이 관음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 제주불교와 관음사의 발전을 위한 새 모습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 한라산 중턱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관음사는 본사의 기능과 함께 제주시내에 포교당을 갖고 있다. 이와함께 제주불교의 활성화
를 위한 다양한 계획들이 최근의 관음사 스님들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 총무스님은 우선 관음사 안에 명부전을 건립해 지역민과 더욱 밀접한 관계형성 속에서 포교의 활성화를 기할 것이라고 말한다.
 
관음사 대웅전 옆에 조성될 명부전은 약 10년 전부터 계획을 갖고 있었던 불사다. 명부전은 제주도민의 특수한 상황에서 기획된 불사이기도 하다. 4․3사건을 기화로 제주도민의 다수가 같은 날 희생자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가 희생자의 영가천도제를 한 곳에서 치루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토속적 신앙이 여전히 내재하고 있는 특수한 제주도 상황에서 불교가 지역민들을 불교 속으로 더욱 가깝게 하고 부처님 법속에 포용할 수 있도록 건립되는 것이 명부전이다. 관음사측은 명부전 안에 납골당을 설치해 불교적 차원의 장례의식을 이끌어 내는 데도 기여할 생각이다. 명부전이 완공되면 제주에서 불교가 지역민을 위한 대규모 영가천도의 식을 한 날, 한 장소에서 행할 수 있고 희생자의 위령을 위해서도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관음사측도 이 명부전 불사가 지역민과 지역사회에 불교의 신심을 더욱 강화하고 제주불교의 새모습을 창조할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함께 관음사는 제주시내 중앙동에 위치한 포교당 건물(약4백70평)등 사찰소유 재산 및 운영 등을 승가와 재가신도가 공동운영 한다는 방안도 갖고 있다. 이같은 방안은 사찰 재정의 활용과 운영을 종래의 승가 자체의 결정방식에서 벗어나 재가신도와 함께 협의하고 운영함으로써 신도의 적극 동참 및 신뢰를 기한다는 것이다.
 
관음사의 이런 방안은 현행 사찰 대부분의 경직된 사고에서 크게 진전된 것으로 시법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는 평이다. 향후 관음사는 이같은 사부대중과의 공동논의 운영을 통해 더욱 활발한 불사와 포교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화엄사

산악신앙과 문수보살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노고단 서쪽에 자리한 화엄사. 
제19교구본사 화엄사가 자리한 지리산은 영 ․ 호남의 분수령으로 지덕을 갖춘 영산이다. 백두산의 큰 줄기가 이 곳 남해에 이르러 끝마쳤다 해서 과거엔 두류산(頭流山)이라 불렸었다. 천왕봉과 중봉을 서쪽에 두고 동쪽으로 흘러오다가 덕평봉 반야봉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산록은 기암과 벽송으로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동서를 가로 지르는 백여리의 산록이 유연하면서도 웅장함을 잃지 않는 계곡을 감싸고 있어 예부터 신라 오악중 남악에 속해 있었으며, 삼신산(三神山)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사시사철 조화로운 변화는 우리의 조상들로 하여금 신령스러운 산으로 믿어져 왔던 것이다.
 
「택리지(擇里誌)」에 기술된 지리산은 이런 모습이다.
세상에는 금강산을 봉래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고, 한라산을 영주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 「지지(地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성신(太乙星神)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또한 땅이 남해에 가깝고 기후가 온난하여 산 속에 대나무가 많고 사람이 없어도 감과 밤이 저절로 열리고 떨어진다고 해서 온 산이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 불렸다. 이렇듯 오랜 종교인 불교가 본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산악신앙과 습합되어져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터를 제공하는데 지리산도 한 몫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산에 거주한다는 신선들은 보살의 명칭으로 바뀌어 나갔다. 금강산에는 법기(法起)보살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현신했다 함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이 땅에 본시 불보살의 주처였다는 불국토 신앙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도량이다. 그리하여 고기(古記)에는 문수사리의 리를 따서 지리산(地利山)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은 길상봉이라고도 불렸었다. 이는 고려 건국의 왕건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이와 관련된 일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지리산의 주신(主神)은 선도성모(仙桃聖母)이며 또한 노고단(老姑壇)이라고도 불린다. 우리 태조가 늘 이 곳에서 기도하여 지리산 신의 감응을 받았으므로 남악가(南嶽訶)를 남악소의방(南嶽所義坊)에 옮겨 세웠다’고 하여 지금도 그 유기(遺基)가 남아있다.
 
이 천연의 승경 지리산 주변에는 화엄사 뿐 아니라 수많은 명찰과 고적이 산재해 있다. 하동 진주에 이르는 남쪽에는 천은사, 쌍계사, 연곡사가 있고 동으로는 법계사, 대원사, 북에는 실상사가 자리하고 있다.

악기조사의 개창 

  풍요롭고 신령스러운 땅 지리산에 세워진 화엄사는 범승(梵僧)인 연기조사에 의해 개산된 것으로 그 연원은 까마득하게 멀기만 하다.  화엄사의 일주문을 경계로 하여 가름된 시간의 흐름은 완급을
달리한 듯 하여 시간이란 단위는 고정된 절대치를 갖고 있진 않은 듯 느껴진다.
 
 현대 물리학이 하나 둘 벗겨나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이렇듯 화엄사의 일주문에 서서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됨은 세속과 달리 시간의 완급을 조절했던 유명 무명의 스님들 그리고 불교를 좋아하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했던 선조들만의 공감대에서 형성된 것일게다.
 
이것은 미물들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과 영장인 사람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이 다르듯 세속과 지리산 화엄사가 갖고 있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 것과는 같은 이치일게다. 화엄사의 개창을 맡았던 범승 연기조사의 탑이 아직도 도량을 수호하고 있고 네 마리의 사자로 하여금 무명을 밝히게한 석등, 각황전의 고색창연합이 그러한 분위기에 젖게 한다.
 
화엄사의 초창과 창건주에 관해 판본사적에는 신라 진흥왕 5년 인도승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지승람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스님이 세웠다고만 하고 있다. 「구예속지(求禮續誌)」에는 좀더 부연해서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법왕이 이 곳 화엄사에서 3천 승려를 입주(入住)케 했다고 하여 당시의 모습을 적고 있다. 
 
 연기스님은 인도스님으로 구전에는 연마(燕馬)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고 해서 연기(燕起)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이 곳 지리산에 와서 주석하면서 화엄학을 널리 현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창건한 사찰은 화엄사 외에도 흥덕 연기사, 나주 운흥사, 천은사, 연곡사, 곤양 서봉사, 산청 대원사 등이 남아 있다. 처음 연기조사에 의해 초창된 화엄사의 규모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을 갖춘 소규모의 절이었다.

화엄불국세계

  그보다 근 1세기 후 의상대사가 이 곳에 오면서 화엄사는 대도량으로서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문무왕 10년 의상스님은 화엄십찰을 전교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봉성지(鳳城誌)」에는 의상스님의 왕명을 받고 삼층의 장육전(丈六殿)을 건립하고 그 둘레를 석각(石刻) 화엄경으로 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석경(石經)에 새겨진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은 장육전의 건립보다 1세기나 후에 번역된 것으로 앞뒤가 맞질 않는다.
 
근세 화엄사의 대강백이었던 진진응(陳震應) 스님은 이 석경의 건립은 신라 말엽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아울러 이 석경의 돌이 모두 경주에서 온 옥석이라는 설에 대해서도 그것은 모두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납석인데, 임란의 병화로 불타면서 기와색깔이 부옇게 변색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의상의 중건 이후, 다시 화엄사가 확장된 것은 경덕왕(景德王) 때의 일이다. 경덕왕은 칙령으로 화엄사를 중건, 새롭게 모습을 꾸며 가람 8원(阮) 81암(庵)의 대규모의 사찰로서 소위 화엄불 국세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개산 이후 최고의 융성기를 누리게 된 것은 신라말엽 화엄사를 중수한 공덕주 도선(道詵)에 의해서였다. 15세기 때 화엄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스무살 때 혜철대사의 강하(講下)에서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헌강왕은 스님의 이러한 도력을 흠모하여 궁궐로 모셔 법문을 듣기까지 하였다. 왕실의 배려로 도선스님은 화엄사를 확장하고 총림대도량(叢林大道場)을 열어 화엄사의 중흥조로 일컬어졌다.
 
도선스님은 흔히 풍수지리나 참위설 등의 대가로 알려져있다. 스님의 도참설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 인용될 만큼 인정을 받았고 이러한 영향력은 도선이 세상을 뜬 후에도 고려태조는 그의 유촉을 따라 오백선찰을 건립하고 삼천팔백의 절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 화엄사는 도선스님의 주처로 제일 먼저 중수되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세종 6년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도 임란의 병화를 피해갈 순 없었지만 배불의 와중 속에서도 화엄사는 고승들이 주관하는 법석의 요람지였다. 설응, 승인, 부휴, 중관, 무염같은 대선사와 법사가 이 곳에서 법회를 마련했다는 기록은 화엄의 교지를 선양했던 화엄사의 역할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또한 화엄사 승군이 임란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를 기술하고 있는데, 난이 평정된 후 선조가 그 활약을 치하하기 위해 어필서책을 하사하는 등 화엄사 구복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화엄사의 1차 복구작업은 인조 8년 벽암대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후 계파성능 선사는 벽암의 숙원이었던 장육전을 중건하였고 삼존불 사보살상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성대한 경찬대법회를 열었다. 숙종은 장육전을 각황전이라 친히 사액하고 사격을 한 층 더 높여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원융무애한 세계
  화엄의 철학은 기존의 노장사상과 그밖의 다른 전통적 사고 방식을 원만하게 회통적(會通的)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관용적인 동양인의 심성을 함양하였고, 동양의 지혜로운 선각자들을 세계에서도 가장 뛰어난 정신문명의 창조자로 만드는 밑거름 구실을 했다. 이러한 화엄의 세계를 구현해 나가고자 한 화엄사의 고원하고 광대한 이념은 오랜 세월의 연륜을 쌓으며 무수한 고승대덕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나타난 결실이다.   불전 가운데 가장 방대한 화엄경을 돌에 새겨 각황전 네벽에 쌓아올린 지극한 정성으로 화엄의 세계를 천착해 나간 고승들에 의해 화엄사는 이름 그대로 화엄의 근본 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창건 초기 때부터 갖춘 요사 겸 설법전이었던 해회당(海會堂)의 모습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산문 입구의 부도전에서부터 약 백미터쯤 오르면 화엄사 일주문이 나타나고 일주문을 지나고 나면 문수․보현의 동자상을 안치한 금강문에 닿는 다. 그 뒤로 목각 사천왕상을 안치한 제 3문 천왕문을 갖춰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이문(不二門)을 이룩하고 있다.
 
중생구제를 위해 그야말로 널리 화엄의 세계를 펼쳤던 보제루를 지나고 나면 비로소 화엄사의 위용이 시야에 꽉 들어찬다.   종교의 의미는 어찌보면 신성함과 금기사항을 얼마나 잘 유지해 나가는가 하는데 그 생명력이 부여된다고 봤을 때 과거불당과 법당은 엄연히 구분했던 것에 지금의 불당은 그만큼 격이 낮아져 있다고 봐야한다.
 
화엄사의 각황전, 대웅전, 원통전 등이 불당중에 물론 국보로 지정되어 불자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문화재 이전에 불당이라는 위치가 더 중요하다. 정문을 통해 안을 기웃기웃하는 모습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관광객들에게 참배하는 예절을 가르치는 안내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사찰을 순례하면서 느낀 점이다.
 
 삼여래 사보살상을 안치한 정면 7간 측면 5간의 2층 팔작지붕 각황전의 웅대함과 짝을 이룬 석등. 각황전의 서남방쪽으로 108계단을 오르면 형태가 특이한 3층 석탑과 석등이 있다. 사전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창건주 연기조사의 효성을 추앙하여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다.
 
사방에 사자 네 마리가 석탑을 바치고 있고 그 중앙에 승상(僧像)이 합장하여 머리로써 탑을 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 하며, 그 바로 앞에는 석등이 있는데, 석등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승상은 연기조사라 한다. 그 모습이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님을 느끼게 해준다. 화엄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일념으로 보기를 제불이 세간에 출현 하지만 사실은 생긴 일 없음을 알면 그 사람이야말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지리라.’